문제를 풀 때 많이들 놓치는 것
2013학년도 수능 문학 문제입니다. 원래 문제의 답을 고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내신st로 바꿔봤습니다. 일단 풀어봅시다.
Q. (가)의 화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다음 밑줄 친 시어 중 시적 의미가 ㉠과 가까운 것을 모두 고르시오.
벗님네 남산에 가세 좋은 기약 잊지 마오
익은 술 점점 쉬고 지진 화전 상해 가네
자네가 아니 간다면 내 혼자인들 어떠리 <제1수>
어허 이 미친 사람아 날마다 흥동(興動)*일까
어제 곡성 보고 또 어디를 가자는 말인고
우리는 중시(重試) 급제하고 좋은 일 하여 보려네 <제2수>
*흥동: 흥에 겨워 다님.
저 사람 믿을 형세 없다 우리끼리 놀아 보자
복건 망혜(幞巾芒鞋)로 실컷 다니다가
돌아와 승유편(勝遊篇)* 지어 후세 유전(後世流傳)하리라 <제3수>
*승유편: 즐겁게 잘 놀았던 일을 적은 글.
우리도 갈 힘 없다 숨차고 오금 아파
창 닫고 더운 방에 마음껏 퍼져 있어
배 위에 아기들을 치켜 올리며 사랑해 보려 하노라 <제4수>
벗이야 있고 없고 남들이 웃거나 말거나
양신 미경(良辰美景)*을 남이 말한다고 아니 보랴
평생의 이 좋은 회포를 실컷 펼치고 오리라 <제5수>
*양신 미경: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
'남산, 승유편, 창'에 대해 판단을 하시면 됩니다. 스스로 해보시고 아래 내용을 읽어보세요.
참고로 답은 '없다'입니다.
실제 기출에서는 적절한 것을 고르라는 문제로 나왔고, 저 세 선지 중에는 정답이 없었습니다. (당시 정답은 <제2수>의 '중시'였습니다. 되게 쉽죠?)
간단하게 해설해봅시다. 일단 (가)의 ㄱ은 '세사'입니다. 단어만 들어도 그냥 느낌오듯이 속세 그 자체입니다.
(가)의 화자는 이러한 '세사'로 하여금 '험하기도 험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해당 문제는 속세와 같은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으라는 문제라는 것이죠.
.............
여기서 '피램 병 형신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이렇게 풀었다면, 살짝 위험합니다. '남산, 승유편, 창' 모두 '속세'는 아니기에 틀렸다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답만' 맞힌 풀이거든요.
이 문제가 물어본 것은, '(가)의 화자의 관점에서 ㄱ과 가까운 시적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세'가 아니라 '(가)의 화자가 싫어할 만한 것'을 고르라는 문제인 것이죠.
물론 (가)가 아주 전형적인 고전시가인 탓에, (가)의 화자가 좋아하는 것은 자연이고 싫어하는 것은 속세라는 단순한 구도가 나오고, 이에 '속세와 같은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으라는 문제로 해석해도 결과적으론 맞는 풀이가 되지만, 정확하게 풀어낸 것은 아니게 됩니다.
나아가, 만약 속세vs자연 구도를 잡고 문제를 풀러가면 '창'이 되게 애매해집니다.
'남산'이나 '승유편'은 누가 봐도 자연 쪽 시어인 것 같은데, <제4수>의 화자는 '창'을 닫고 애나 보겠다며 자연(남산)에 놀러가자는 <제3수> 화자의 권유를 거절하고 있거든요. 단순한 속세vs자연 구도를 이용하면 자연의 반대는 속세이기에, '창'은 옳은 선지가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문제처럼 명확한 정답이 있다면 낚이지 않겠지만, 제가 보여 드린 것처럼 선지 세 개만 가져 오면 생각보다 헷갈리는 학생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은 왜 답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창'이라는 단어 자체만 가지고는 어떠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제4수>의 맥락을 따져 읽어 보면 "나는 그냥 창 닫고 애기나 보면서 쉴래~"라는 의미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창'은 가족과 외부의 경계가 되어 화자로 하여금 편하게 쉬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가)의 화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쉬게 해 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으니, '창'은 위 문제에서 옳은 선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문제를 풀 때 많이들 놓치는 것, 다시 말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두 가지 요소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발문을 통해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게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또 당연하게들 신경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 외에도 발문을 제대로 신경쓰지 않으면 잘못된 풀이를 하거나 아예 틀리게 되는 문제들도 꽤 많습니다.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하면, '발문을 독해하는 것 역시 수능에서의 평가 요소이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2) 모든 시어의 의미는 그 맥락을 통해 결정된다.
'창'이라는 시어는 그 자체로 window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즉,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창'이라는 시어가 <제4수>라는 '맥락'을 만날 때, 그리고 이를 '독해'할 때 비로소 '외부와의 경계로 가족과 편하게 쉬게 해 주는 도구'라는 '시적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수능 문학, 특히 운문문학에서는 이러한 '시적 의미'를 독해해내는 것 하나만 묻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의미'가 결국 '화자의 내면세계'라는, 운문문학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 수능 운문문학 공부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겠구요.
결국 수능 국어의 핵심은 '지문, 발문, 선지를 정확하게 독해하여 의미를 추출하자.'가 되겠네요. 이 핵심을 파고들 수만 있다면, 누구의 강의를 듣든 누구의 교재로 공부하든 잘 해낼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이 개새끼들아
-
질문 ㄱ
-
그저 GOAT... 이런 건 정병훈이 유일해서 너무너무 귀한 컨텐츠임..
-
자야징 1
그래이거야 오르비안한다거해버려서 자기전에 인사할데가 없었다고 안냥히주무세요들
-
시거렛과알코홀 0
-
글이안올라와요
-
이 닉은 옳은게 증명 Q.E.D
-
사실 어디서든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그래도 힙합이라는 문화를...
-
츄가너무좋아 3
-
중복조합 1
중복집합계수
-
생명 지금 유전 개념빼고 다돌렷고 자이스토리도 유전개념빼고 다했는데 어떡해 할까?...
-
ㅈㄱㄴ
-
의대 증원 협의체 회의록 법원 요구에 “없다”… 황당한 복지부 0
[사설]의대 증원 협의체 회의록 법원 요구에 “없다”… 황당한 복지부 교육부와...
-
이츠카와미츠케라레루카나~~
-
캔맥 뭐먹지 2
삿포로 조질까
-
카의 논술 넣으실 분들 과탐 최저 뭐로 맞추실건가요? 5
카의 논술 최저가 원투 또는 투투 투과목 필수라 과탐 뭐로 칠지 고민되는데 혹시나...
-
3일휴르비 후기 4
궁수의전설 시작함 꽤많이올림 프세카 29렙 풀콤성공 공부하는중에도 옯질하는거보고 아...
-
대학의 로망…? 4
몇달만에 돌아와보니 익숙했던 분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네요… 뭔가 슬픔ㅠ . . ....
-
그랬음 이거 진짜 이겼을 수도..
-
메디슨 ㅋㅋ 0
메디슨 이정도면 이중첩자 아닌가ㅋㅋㅋ 패스 진짜 석나가네 ㅋㅋㅋ
-
작심삼일이야 2
술버릇이 오르비야
-
진짜 얘는 2년째 봐도 뭔가뭔가라 찝찝함 듣고 딱 유레카 했던 강사분 있나요 본인은 강민웅 들었었음
-
잘자..
-
고2 영어 공부 3
1학년때는 내신 1~2정도는 떳었는데.. 2학년되서 모고 변형 문제가 더...
-
ㅇㅈ 2
원자 에너지의 발견과 연구는 인류의 과학사에 큰 혁명을 가져왔다. 19세기 후반,...
-
느그흥 골!! 1
1만덕은 못받네요
-
이름이 개없어 보이긴 하는데 4점 중요 기출도 꽤나 들어있네요 ㄷㄷ 24수능 쉬4도...
-
유빈이는 그때에 비하면..
-
덕토 열어주세요 0
-
평균속도, 상대속도 엄청중요함 평균속도는 등차수열하는 느낌 상대속도는 에너지 보존,...
-
으음
-
제정신인가? 2의 1승을 1이라 함 하 시발...
-
하시나요? 20대 전부는 아니고 반만 의대는 빅5 중에
-
하도 마이너하고 다크한거만 파서 요즘 유행하는게 뭔지도 모르겠음 요아소비 아이돌...
-
토트넘 처참하네 1
흥민이형 욕 ㅈㄴ 먹겠네 요즘 김민재도 그렇고 유튜브에서 미친듯이 까이던데 안타깝네
-
종철이 필기노트 2만원주고산거 뜯었는데 내가 도대체 이걸 왜 이돈주고 샀나 천번째 후회중임..
-
1등 독식 2시 00분 00초까지(오르비 서버시간 기준)
-
경한 확통으로 뚫릴까요?..
-
1만덕 받는다
-
본인은 선지 갔을 때 기억 안날 것 같은 내용 - 밑줄침 선지 갔을 때 기억 날 것...
-
인증하는거 4
은근 떨리네 담부턴 안해야지
-
2년만에 공부하는 거라 노장학 기준으로 말해주세요ㅠ
-
몇년만에 군대 재수하기전에 개념은 확실히 알아야겠다 싶어서 시발점 끊었는데 본교재랑...
-
헤어진지 4달 됐는데 편지며,인생네컷이며 사진이며 다 못지우고 있네요... 추가로...
-
저는 영재고를 준비했던 학생입니다. 그러나 영재고를 낙방하고 수학 자신감이 많이...
-
유전 못하겠어요.. 화학은 예전부터 선행했어서 웬만한 킬러는 풀 줄 아는데 오바일까요..
-
기분이다~ 닉변 4
완
-
오노추 2
라이브가 더 조음
선생님 생각전개 잘보고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창을 "닫는다"는 행위를 3수의 화자의 놀자는 권유를 거절하는 행위로 보아 창 자체는
오히려 자연을 환기시키는 시어로 봤는데요,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