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수정됨) · 쪽지

2016-06-05 23: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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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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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회갑 인생을 살며 느낀 점은, 꽤 많지만 그 중 하나는 구태여 자랑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고쳐 쓰면 내가 구태여 자랑해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면 차라리 자랑을 안 하는 게 낫다.

예를 들면, 어느 법학도가 예일대에 다닌다고 했을 때 그는 구태여 내가 꽤 괜찮은 대학을 다닌다고 자랑을 할 필요가 없다. 이건 여타의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잠시 적을 두었던 ICU(한국정보통신대학)라는 대학이 있다. 지금은 카이스트에 편입됐지만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을 총장으로 3학기 3년 졸업,등록금 전액 무료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으로 출범한 대학이다. 당시 누군가 내게 이 대학이 한국방송통신대학이냐며 물었을 때 난 일반학사를 수여하는 특수목적대학이라고 한 마디 하면 될 걸 10마디 대답으로 대신했다.

"한국정보통신대학이라고.. 지원자격 자체가 1등급이고 과학고에서 애들 많이 뽑고 카이스트랑 이제 곧 비슷해질 대학이야. 총장은 정통부 장관이고 모두 영어 수업에 해외 연수 무료로 보내주고 학생당 교수진 비율도 업계 최고이고 기숙사도 사실상 무료야. 입학 전부터 연수를 보내줘 어쩌고 저쩌고"

이 경우 문제는, 듣는 입장이 "와 대단하구나" 생각하기보다 나의 계속되는 늘어지는 말을 얼른 끝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살다 보면, 굳이 부연해야 성립되는 자랑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 또 하나 사례가 있는데 신입생들이 가장 많이 유혹에 빠지는 경우다. 바로 내가 원래 이 학교에 올 성적이 아닌데 원서질을 잘못해서든, 수시에 납치 당해서든 (아무도 관심없는 나만의 사정으로) 입학한 경우이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말을 꺼낼 기회만 엿보게 되는데 입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는 참이면 울분을 토해내기 바쁘다. 

"내가 원래 몇 점을 받았는데.. 그냥 서울대 경영대 가고 싶어서 썼는데 거기 안 되고 여기 왔어" "난 원래 성적이 높았는데 이 공부가 하고 싶어서 여기 왔어." 등등의 말, 좀 더 MSG를 치면 슬슬 "답안지를 밀려 썼다"는 둥의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야사까지 더해진다. (물론 실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저간의 사정에 당신 동기들은 단 1의 관심도 없음에도, 말은 점점 길어진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당신이 "아 원래 대단한 사람이었구나"라고 느끼기 보다 당신이 가진 그 허영에 주목한다. 그러고는 무의식 속에 당신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깝게 이 대학 들어왔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 이외에도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뉴런 하나를 새겼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나이를 먹어 고시를 보고, 취업을 하다 보면 비슷한 사례가 또 생긴다. 고시의 경우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사법시험 1차는 전국 순위 안에 들었는데 2차 볼 때 몸살이 나서  드러누웠어. 집중을 못했어"
"행정고시 3차까지 갔는데 최악의 면접관이 우리 조에 왔더라고. 우리 전부 질문에 말려서 안 됐어"

하나같이 들어보면 실력은 되는데 여건이 안 돼서 안 됐다는 그럴 듯한 항변이지만, 문제는 화자의 의도와 달리 청자는 이런 저간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내가 최종까지 갔는데 ~~해서 안 됐어"라는 말을 아마 취업준비생들은 귀가 닳도록 여러 사람에게 들었을 것이다. 합격을 하고 안 갔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최종까지 갔든 서류에서 안 됐든 안 된 건 안 된 거다. 오히려 자신이 그래도 최종까지 갔다는 조그마한 자랑을 통해 자기가치를 높이려다 사람만 우습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장자는 "입은 닫고 의지는 키우라"고 했다. 보여주면 되는 거다. 어느 자랑에 부연이 붙는 순간, 그건 자기자랑이 아니라 자기기만이 된다. 물론 인류사가 타인에 의한 인정 욕구에 추동되어온 인정 역사라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정을 자신이 pr해서 받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인 방법도 아닐 뿐더러 폼도 안 난다.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인정받는 사람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더라. 

이상이. 작지만 깨닫게 된 소소한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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