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 [1332076] · MS 2024 · 쪽지

2024-10-13 23: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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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2편)-난해함은 연습으로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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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갈 개념어들>

내던져짐(thrownness), 기분(Disposedness, Befindlichkeit), 전락(fallen-ness)

던져짐과 투사(Thrownness and Projection), 가장 고유한 가능성(Ownmost Possibility), 비관계성(Non-relationality)

선취적 결단성(Anticipatory resoluteness), 존재 구조로서의 죄책-존재(Guilt as an existential structure), 잡담과 침묵의 담론(Dicsourse of idle talk and reticence)

시간화와 엑스터시스(Temporalizing and Ecstases), 진정한 시간성과 비진정한 시간성(Authentic and Inauthentic Temporality),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Temporal Structure of Dasein)

현존재의 역사성(Historicality of Dasein), 비더홀룽(Wiederholung), 운명과 운명성(Fate and Destiny)

비은폐성(unconcealing), 과학적 실재주의(scientific realism)



안녕하세요 독서칼럼에 진심인 타르코프스키입니다.

[서론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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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eidegger/


참조 및 재구성.



(연습문제 1)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인 현존재(Dasein)를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는 관점에서 내던져짐(thrownness), 투사(projection), 전락(fallen-ness)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이를 기분(Disposedness, Befindlichkeit), 이해(understanding), 현혹(fascination)이라는 동적 조합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현존재가 선험적 구조로서 타존재자를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열려 있어야 함(having-to-be-open)'을 재정립한 것이다. 현존재의 실존은 상호 연결된 삼차원적 단일 구조인 내던져짐-투사-전락과 기분-이해-현혹을 통해 이해되며, 이는 존재의 총체적 구조인 보살핌(care)을 형성한다. 이러한 보살핌의 구성은 시간성의 주제를 드러내는데, 각각 과거(내던져짐/기분), 미래(투사/이해), 현재(전락/현혹)의 시간적 차원과 대응된다. 내던져짐은 현존재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로, 우리가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Befindlichkeit는 종종 '기분'으로 번역되지만, 이는 단순한 주관적 상태가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근원적 수용성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러한 기분(Stimmung)은 우리가 늘 어떤 기분 속에 있으며, 그를 통해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일상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분은 내적 주관적 색채가 아닌 세계-내-존재의 한 측면으로, 기분과 기분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는 우리의 존재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기분은 내부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투사를 통해 세계 속의 다양한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기며, 이해는 이러한 투사의 과정으로서 드러난다. 이때 이해는 반드시 의식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숙련된 활동이나 해석, 혹은 언어적 진술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현존재는 전락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에서 멀어져 '그들(das Man)' 속에 빠지게 되며, 이는 수다, 호기심, 애매함과 같은 형태로 표현된다. 이러한 전락은 세계에 대한 현혹을 통해 세계를 은폐하거나 가리는 과정으로, 현존재의 일상적인 함께-존재(Being-with)의 방식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와 비본래적 자아의 구분에 이르게 되는데, 본래적 자아는 '나의 것'인 자기이며, 비본래적 자아는 '그들'에 잃어버린 자기이다. 여기서 '그들-자기'는 타인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한 양태로서, 전락은 현존재의 실존적 구성의 일부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비본래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이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비본래성에 기인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래성은 타인과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자기'에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타인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래적 존재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선택을 통해 실현되며, 이는 존재의 총체성인 보살핌의 구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본래성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제2부에서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며,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분과 이해, 현혹을 극복해야 한다.
-기분(Befindlichkeit)은 단순한 주관적 상태로서, 세계-내-존재와는 별개의 내적 감정으로 이해된다.
-현존재는 투사를 통해 본래적 가능성에서 멀어지며, 이는 '그들' 속에 빠지는 전락의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를 '그들(das Man)'에 잃어버린 자기로 정의하고, 비본래적 자아를 '나의 것'인 자기로 보았다.
-전락(fallen-ness)은 현존재의 실존적 구성과 무관하며, 오직 외부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힌트>
-하이데거는 기분, 이해, 현혹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현존재의 실존적 구성 요소로 파악하였다.
-기분은 단순한 주관적 상태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내적 감정이 아닌 근원적 수용성을 나타낸다.
-현존재는 투사가 아닌 전락을 통해 본래적 가능성에서 멀어진다; 투사는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를 '나의 것'인 자기로, 비본래적 자아를 '그들'에 잃어버린 자기로 구분하였다.
-전락은 현존재의 실존적 구성의 일부로,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비본래성에 기인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선험적인 구조를 통해 타존재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열려 있어야 함'을 거부하고 고정된 본질을 강조하였다.
- 하이데거는 기분을 단순한 주관적 상태로 보았으며, 외부 세계와 독립적인 내면의 감정이라고 정의하였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전락을 통해 '그들' 속에 매몰되지만, 이러한 전락은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고립된 자아로 규정하였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본래성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을 제시하고, 긍정적인 자기 변화를 위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힌트>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열려 있어야 함'을 통해 타존재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고정된 본질을 강조하지 않았다.
- 하이데거는 기분을 단순한 주관적 상태가 아닌, 세계-내-존재의 근원적 조건으로 보았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전락은 현존재를 본래적 가능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현상이며,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니다.
-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아를 타인과의 고립이 아닌, '그들-자기'에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타인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본래성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나 긍정적인 자기 변화를 위한 명확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내던져짐(thrownness)"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 없이 던져져 있다는 실존적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인간 존재가 환경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주어지기 전의 순수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출생지가 그 사람의 문화, 언어, 사회적 배경을 규정짓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분(Disposedness, Befindlichkeit)"은 단순한 감정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존재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수용성을 나타내며, 이는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닌, 세계와 우리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상태이다. 이 개념은 우리가 늘 어떤 특정 분위기 속에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게 만드는 필터와 같다.

-"전락(fallen-ness)"은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가능성에서 멀어져 사회적 규범이나 집단적 의견에 휩쓸리게 되는 상태로, 이는 우리의 본래적 자아와 비본래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야기한다. 이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우리가 타인의 기대와 의견에 쉽게 휘둘리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습문제 2)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Dasein)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Dasein은 던져짐과 투사로 구성되어 있어 항상 자신의 가능성에 앞서 존재하며, 이로 인해 불완전하다. 이러한 Dasein의 존재를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죽음이며,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Dasein의 전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 어려움을 겪는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죽은 자의 존재 상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에 하이데거는 Dasein이 자신의 죽음을 항상 앞에 놓인 불가피한 가능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모든 존재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으로서, 이는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이지만 항상 Dasein의 앞에 존재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은 Dasein을 고유한 자기 자신(본래적 자기)으로 드러내며, 이는 Dasein이 본질적으로 유한함을 보여준다. 죽음은 '가장 고유한'(ownmost) 가능성으로서, 다른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비관계성(non-relationality)을 지닌다. Dasein의 존재 구조인 배려(care)는 이제 죽음으로의 존재(Being-towards-death)로 재해석되며, 이는 무(無)에 대한 내부적 관계를 의미한다. 본래적 방식에서 죽음은 선구적 각오(anticipation)와 불안(anxiety)을 통해 드러나며, Dasein은 자신의 유한성과 실존적 가능성을 직면하게 된다. 반면에 비본래적 방식에서는 기대(expectation)와 두려움(fear)을 통해 죽음을 회피하며, '사람들은 죽는다'는 식의 일상적 담론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은폐한다. 이러한 비본래적 태도는 Dasein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확실성을 외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을 '그들'(they-self)에 종속시킨다. 따라서 Dasein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 존재 전체를 통찰하는 열쇠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해석적 중재를 통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로서, 직접적인 이해가 아닌 '무엇으로써'의 이해(taking-as)를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틀린 선택지>
1. 하이데거에 따르면 Dasein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경험함으로써 전체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2. 비본래적 방식에서 Dasein은 기대와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과 실존적 가능성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한 진정한 확실성에 도달한다.
3. 하이데거는 Dasein의 존재 구조인 배려(care)를 무(無)와의 외부적 관계로 재해석하여, 죽음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죽음은 모든 존재 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으로서, Dasein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5. 하이데거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Dasein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힌트>
- 지문에서는 개인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Dasein이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여 전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당하다.
- 지문에서는 본래적 방식에서 선구적 각오와 불안을 통해 Dasein이 유한성과 실존적 가능성을 직면한다고 하며, 비본래적 방식에서는 기대와 두려움을 통해 죽음을 회피한다고 하였으므로, 비본래적 방식에서 죽음의 확실성에 도달한다는 주장은 부당하다.
- 지문에서는 배려가 죽음으로의 존재로 재해석되며, 이는 무에 대한 내부적 관계를 의미한다고 하였고, 죽음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해된다는 내용은 없으므로, 이 주장은 부당하다.
- 지문에서는 죽음이 모든 존재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으로서, Dasein의 유한성을 드러낸다고 하였으므로, 죽음이 존재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주장은 부당하다.
- 지문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다고 하였으며, Dasein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놓인 가능성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당하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던져짐과 투사(Thrownness and Projection)"는 인간 존재(Dasein)가 자신의 환경과 역사에 의해 이미 결정된 조건들 속에 던져져 있지만,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투사하며 나아가는 이중적 구조를 의미하며, 이는 즉흥적으로 출발해야 하는 여행과도 같다.

-"가장 고유한 가능성(Ownmost Possibility)"은 죽음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는 모든 다른 가능성을 무로 만드는 가장 궁극적이고 개인적인 가능성으로,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비관계성(Non-relationality)"은 죽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개인과 관련된 가장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가능성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죽음이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고 각 개인의 내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비밀과도 같다.




(연습문제 3)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배려로서의 시간성으로 해석하면서, 그 핵심 개념으로서 '선취적 결단성'을 제시한다. 선취(anticipation)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한 존재 방식을 향해 나아가는 '다가감-존재'의 형태이며, 결단성은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 혹은 태도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양심(良心)이나 죄책-존재를 통해 진정한 자기(self)를 재해석하며, 진정한 자기는 양심의 부름에 열려 있는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죄책-존재는 도덕적 규범의 위반으로 인한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이 존재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존재 구조를 의미한다. 즉, 양심은 근본적으로 발견적(disclosive)인 현상으로서, 현존재를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의 유한성에 눈뜨게 하여 진정한 존재로 소환한다. 하이데거는 양심(죄책-존재)이 배려의 구조를 가지며, 이는 투사(projection), 던져짐(thrownness), 담론(discourse)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담론은 세계-내-존재의 이해 가능성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언어적 현상일 수도 있고 행위를 통한 의미의 표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담론과 전락(fallen-ness), 진정성(authenticity)의 관계는 모호하며, 담론은 잡담으로 나타나는 비진정한 방식도 존재한다. 배려가 진정하게 실현될 때, 담론은 침묵(reticence)으로 경험되어 잡담을 물리치고 양심의 부름을 들을 수 있게 하며, 투사는 자신의 본질적 구조로서의 무(無)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던져짐은 불안(anxiety)으로 경험되어, '그들(das Man)'에 의해 결정된 이해 가능성의 장(field)에서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무존재(not-Being)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침묵, 죄책, 불안은 현존재를 '그들'의 존재론적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며, 이러한 통일된 구조가 진정한 현존재의 존재를 특징짓는다. 따라서 '결단성'은 침묵-죄책-불안의 새로운 명칭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진정성과 자유의 연결을 나타낸다. 결단성은 현존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그들'이 제시하는 패턴에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고,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제공되는 가능성 중 하나에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단성을 인간 주체의 의식적 선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이는 오히려 현존재를 결정하는 사건(event)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사건은 현존재의 본질적 유한성을 드러내며, 선취적 결단성의 개념을 통해 결단성과 선취의 내적 연관성이 나타난다. 결국, 죄책-존재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양심의 부름에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진정한 죽음의 인식이 바로 선취이며, 이를 통해 결단성은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 다가감-존재가 된다. 따라서 결단성의 개념은 현존재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이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존재에 대한 개방성과 열림에서 벗어남 없는 서 있음(stretching forth)임을 의미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양심이 진정한 자기 발견에 방해가 되며, 배려의 구조에서 침묵이 배제된다고 주장한다.
- 선취적 결단성은 현존재가 '그들'이 제공하는 사회적 패턴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 던져짐은 현존재가 불안을 느끼지 않고 일상적 몰두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 담론은 항상 언어적 표현으로만 나타나며, 행위를 통한 의미의 표출은 불가능하다.
- 결단성은 단순히 인간 주체의 의식적 선택으로 이해되며, 현존재를 결정하는 사건으로서의 성격은 없다.
<힌트>
- 하이데거는 침묵이 배려의 구조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양심의 부름을 들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 선취적 결단성은 '그들'의 패턴에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 던져짐은 불안으로 경험되어 현존재가 일상적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 담론은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한 의미의 표출로도 나타나며, 비진정한 방식으로는 잡담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 결단성은 인간 주체의 의식적 선택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현존재를 결정하는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에 따르면, 죄책-존재는 개인이 저지른 도덕적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치심이나 후회와 같은 심리적 감정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담론을 항상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하며, 잡담과 같은 비진정한 담론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하이데거는 던져짐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것을 통해 개인이 '그들'의 이해 가능성의 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결단성을 개인의 의식적인 선택이나 행위로 간주하며, 이를 통해 현존재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본다.
- 하이데거는 죽음을 삶의 끝으로만 이해하며, 진정한 죽음의 인식을 통해 현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죄책-존재를 도덕적 규범 위반으로 인한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이 존재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존재 구조로 본다.
- 하이데거는 담론이 잡담으로 나타나는 비진정한 방식도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 하이데거는 '그들'의 이해 가능성의 장에서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무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 하이데거는 결단성을 인간 주체의 의식적 선택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이를 현존재를 결정하는 사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진정한 죽음의 인식이 바로 선취이며, 이를 통해 결단성은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 다가감-존재가 된다고 본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선취적 결단성(Anticipatory resoluteness)"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를 갖춘 상태로서, 이는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기 존재의 본질적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존재 구조로서의 죄책-존재(Guilt as an existential structure)"는 단순한 도덕적 감정을 넘어선, 도덕적 규범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현존재의 구조를 뜻하며, 이는 양심의 부름에 열려 있음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드러낸다.
-"잡담과 침묵의 담론(Dicsourse of idle talk and reticence)"은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담론의 방식이 비진정한 형태로 표출될 때 '잡담'이 되며, 진정한 담론이 이루어질 때는 침묵으로 경험되어 양심의 부름을 들을 수 있게 하는데, 이는 내적으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본질적 무를 인식하는 투사와 연결된다.




(연습문제 4)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자 의미 형성(sense-making)을 의미하는 돌봄(care)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으로 시간성(temporality)을 제시한다. 시간성은 현존재가 자기의 잠재적 진정성을 실제화할 수 있게 하는데, 이는 현존재가 과거의 문화-역사적 제약과 가능성을 현재에서 인지하여 미래로 스스로를 진정성 있게 투사(projection)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주장—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는 시간에의 내재성이 선험적 조건이다—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시계 시간(연속된 "지금"들의 무한한 배열)이나 물리학적 현상으로서의 시간을 다루지 않는데, 이러한 시간 개념은 현존재의 실존적 구성의 내부적 특징인 시간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를 시간화(temporalizing)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엑스터시스(ecstases, 탈자)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엑스터시스는 근본적 통일성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엑스터시스로서 하나의 통일성에서 상호 연결되어 드러난다. 이로써 현상학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순차적으로 배열된 개별 사건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게 된다. 현존재의 실존은 투사(projection), 던져짐(thrownness), 전락(fallenness)/담론(discourse)으로 특징지어지며, 각각은 특정한 시간적 차원을 주로 나타낸다: 투사는 미래 지향적이며, 던져짐는 과거와 관련되고, 전락과 담론은 현재 지향적이다. 그러나 시간성은 근본적으로 단일한 구조이기 때문에 각 요소는 다면적 시간성을 지닌다. 따라서 현존재의 각 인식 사건은 세 가지 시간적 엑스터시스를 모두 통해 해석되어야 하며, 그 결과 각 순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정한 시간성(authentic temporality)은 미래를 우선시하는 반면, 비진정한 시간성(inauthentic temporality)은 현재를 우선시한다. 결국 시간성은 돌봄이 존재하기 위한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으로서, 이는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의미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는 칸트의 시간에 대한 선험적 조건을 완전히 부정하고, 시계 시간의 개념을 돌봄의 가능 조건으로 제시한다.-현존재의 실존에서 투사는 과거 지향적이며, 던져짐는 미래와 연관되고, 전락과 담론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엑스터시스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된 통일성으로 나타내며, 미래를 배제하여 시간성을 설명한다.-하이데거에 따르면 비진정한 시간성은 과거를 우선시하며, 진정한 시간성은 현재를 중시하여 돌봄의 의미를 재해석한다.-시간성은 현존재의 의미 형성을 방해하는 제약 조건으로 작용하여, 돌봄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힌트>
-하이데거는 칸트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시계 시간을 돌봄의 가능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지문에서는 투사가 미래 지향적이고, 던져짐는 과거와 관련되며, 전락과 담론은 현재 지향적이라고 말한다.-엑스터시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통일성에서 상호 연결되어 드러난다고 설명되며, 미래를 배제하지 않는다.-지문에서는 진정한 시간성은 미래를 우선시하고, 비진정한 시간성은 현재를 우선시한다고 한다.-시간성은 돌봄이 존재하기 위한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으로서, 의미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지문에 나온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칸트의 시간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여 설명하며, 이는 시계 시간이나 물리학적 시간과 같은 객관적 시간 개념을 통해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시간적 분리는 현존재의 실존적 의미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엑스터시스를 미래에 대한 투사로만 이해하며,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상황은 현존재의 미래 지향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진정한 시간성이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현존재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하며, 시간성보다는 오히려 공간성이 현존재의 의미 형성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칸트의 시간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시계 시간이나 물리학적 시간과 같은 객관적 시간 개념이 아닌, 현존재의 실존적 시간성을 강조한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현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엑스터시스를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 설명하며,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상황,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본다.
- 하이데거는 진정한 시간성이 미래 지향적인 삶을 통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현존재의 존재 방식과 의미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한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시간화와 엑스터시스(Temporalizing and Ecstases, 탈자)" 개념은 현존재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근본적 통일성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각각의 시간적 차원이 고유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를 설명한다.

-"진정한 시간성과 비진정한 시간성(Authentic and Inauthentic Temporality)"은 시간성을 미래 중심으로 진정성 있게 구성하는 방식과 현재 중심으로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방식을 구별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Temporal Structure of Dasein)"는 투사(projection), 던져짐(thrownness), 전락(fallenness)/담론(discourse) 각각이 미래, 과거, 현재와 관계를 맺으며,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과 역사성을 어떻게 체험하고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연습문제 5)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성과 역사성의 개념을 심도 있게 분석하며, 그중에서도 그는 현존재의 역사성(historicality)을 강조한다. 이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물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 현존재의 유한성을 죽음에만 한정하지 않고 탄생과 죽음 사이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한다. 여기서 탄생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문화화(enculturation)의 순간으로 해석되며, 이는 생물학적 인간이 선행하는 세계, 즉 문화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장(field of intelligibility)에 던져지고 그 위에 스스로를 투사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는 현존재의 헤리티지(heritage)로서 역사적으로 재해석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상호 얽혀 있음을 나타낸다. 하이데거는 이 현상을 독일어로 '비더홀룽(Wiederholung)'이라 부르는데,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행위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회수(retrieving)'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문화적 조상들의 행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영웅적 틀로 삼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투사한다. 이 과정은 현존재가 탄생과 죽음 사이를 늘려가는 특정한 움직임으로서, 이를 그는 '역사화(historizing)'라 부른다. 역사화는 돌봄(care)으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의 선험적 구조이며, 문화화와 유한성 사이를 연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헤리티지 개념이 사회적 결정론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논쟁이 있다. 역사성이 현존재의 존재 구성의 한 측면이기 때문에, 개인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한 하이데거는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의 것과 통합하려는 시도가 현존재의 전락을 나타낼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는 호기심과 만능적 이해의 가면을 쓴 표류로 본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헤리티지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헤리티지와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존재의 유한성을 통찰함으로써 현존재는 안락함이나 회피의 다중적 가능성에서 벗어나 운명의 단순성으로 돌아오며, 이는 현존재가 상속받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가능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죽음을 향해 넘겨주는 '운명(fate)'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운명은 개인의 역사화를 넘어 공동체의 공유된 역사화인 '운명성(destiny)'으로 확장되며, 이는 문화적 헤리티지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자신을 재구성하는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주장은 운명을 기반으로 자신의 문화를 정직하고 명시적으로 회수함으로써, 그 문화가 자신을 형성하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있으며, 이는 다른 문화의 풍요로운 구조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유한성을 오로지 죽음에만 제한하여 파악하며, 탄생과 삶의 전체적인 시간적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역사적 헤리티지나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게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완전히 재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비더홀룽'을 통해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존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전락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이상적 상태로 본다.
-하이데거는 역사화를 현존재의 개인적 돌봄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며, 이를 공동체의 운명성으로 확장하는 것을 부정하고, 공유된 역사화를 인정하지 않으며, 개인의 역사화만을 중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유한성을 인식함으로써 헤리티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를 재구성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힌트>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죽음에만 제한하지 않고, 탄생과 죽음 사이의 전체적인 시간적 맥락에서 현존재를 이해하며, 탄생을 중요한 요소로 본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헤리티지와 문화적 맥락 없이 자신을 전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며, 헤리티지의 창조적 수용을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를 현존재의 전락으로 보고, 표류로 나타난다고 지적하며, 이를 경계한다.
-하이데거는 역사화가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운명성으로 확장되어 공유된 역사화를 포함한다고 주장하며, 개인과 사회의 재구성을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헤리티지를 벗어나기보다 창조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헤리티지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지지하지 않는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인간이 문화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장에 던져지기 이전의 생물학적 존재 상태를 강조하며, 이를 통해 현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비더홀룽'을 통해 과거의 행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을 '역사화'라고 정의하며, 이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자신의 헤리티지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사회적 결정론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 하이데거는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현존재는 자신의 문화적 편견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생물학적 존재 상태를 강조하기보다는, 인간이 문화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장에 던져진 존재임을 강조하며, 현존재의 유한성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조건으로 본다.
- 하이데거는 '비더홀룽'을 과거 행위의 단순한 극복이 아닌, 창조적 수용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회수'로 설명하며, 역사화는 개인의 자유 의지보다는 현존재의 선험적 구조에 가깝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헤리티지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헤리티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사회적 결정론을 반박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 하이데거는 모든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경계하며, 오히려 자신의 문화적 헤리티지를 정직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낯선 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을 '호기심'과 '만능적 이해'라는 가면을 쓴 표류로 본다.
- 하이데거에게 운명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현존재의 유한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현존재의 역사성(Historicality of Dasein)"은 인간 존재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얽힌 복합적 구조로,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삶의 연속이 아닌 문화적 맥락에서의 탄생과 죽음 사이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비더홀룽(Wiederholung)"은 과거의 행위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투사로 변환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는 음악에서 기본 멜로디를 테마로 새로운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운명과 운명성(Fate and Destiny)"은 개인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헤리티지를 창조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가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경로를 형성하는 과정을 나타내며, 이는 마치 심포니에서 각 악기가 개별적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하나의 조화로운 곡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연습문제 6)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해가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불유쾌한 상대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하여, 진정한 '다자인(Dasein)'이 데카르트적인 자기 충족적 주체가 아니라 '세인(They)'과 변형된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하며 이를 반박한다. 그는 세계들, 즉 그가 때때로 '실재성(Reality)'이라고 부르는 '관여의 네트워크(networks of involvements)'는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현상이지만, 그 자체로서의 자연, 즉 '실재(The Real)'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자연은 우리의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숙련된 실천 활동에 따라 만들어진 문화적으로 특정된 형태로, 준비-된(hand) 도구로서 발견될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숲은 목재의 산림으로, 산은 암석의 채석장으로, 강은 수력으로, 바람은 돛의 바람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자연이 과학을 통해 현-존재로서 발견될 때, 그 이해 가능성은 본질적으로 문화 간의 특성을 지니며, 이는 돌이나 나뭇가지로 무기를 만들 수 있지만 공기나 물로는 만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화 독립적인 자연의 인과적 속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속성과 과정은 하이데거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는 "실재성이 다자인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근거한다고 해서, 다자인이 존재할 때에만 그리고 존재하는 동안에만 실재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입장은 과학이 우리의 문화적 사용과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를 그 자체로 드러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온건한 형태의 과학적 실재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 존재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다자인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이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다자인이 필요하며, 이는 '존재'가 의미 생성, 즉 이해 가능성과 관련되고, 존재자가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는 방식이 우리가 다자인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진리 개념을 재정의하여, 전통적으로 명제와 상태 사이의 대응으로 여겨진 진리를 넘어서 '본원적 진리(original truth)'를 제시하며, 이는 존재자가 발견될 수 있는 이해의 장(field of intelligibility), 즉 세계를 수립하는 다자인의 '비은폐성(unconcealing)' 과정이다. 이러한 본원적 진리는 명제적 진리가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명제적 진리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그는 도구를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사용하는 숙련된 실천 활동에서 드러나는 '도구적 진리(instrumental truth)'를 제시하여, 진리가 명제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부 해석자들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진리 개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본원적 진리와 도구적 진리를 구분하지 않아 그의 사상을 오해한다고 비판받는다. 결국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단순히 발생하기 위해 다자인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이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다자인이 필요하며, 진리는 비은폐로서의 드러남이며, 명제적 진리는 이에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접근은 엄격한 과학적 실재주의와의 긴장을 야기할 수 있지만, 불유쾌한 상대주의를 피하면서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다 정교하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는 자연 자체, 즉 '실재(The Real)'가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현상이므로, 다자인의 존재 없이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고 명확히 주장하며 이를 강조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명제적 진리는 본원적 진리에 완전히 환원될 수 있으며, 따라서 진리는 결국 명제와 상태 사이의 대응으로 정확히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도구의 문화적 사용이 숙련된 실천 활동과 무관하게 진리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며, 이는 결국 진리가 명제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자인이 필요하며, 자연적 존재는 다자인 없이도 그 자체로 완전히 이해 가능하다고 명백히 주장하면서 이를 강조한다.  
일부 해석자들은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여, 본원적 진리와 도구적 진리를 명확히 구분하고 그의 사상을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비판받고 있으며, 이는 지문에서도 언급된다.

<힌트>
지문에서 하이데거는 자연 자체, 즉 '실재(The Real)'는 문화적으로 상대적이지 않으며, 다자인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자연이 다자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지문의 내용과 모순된다.  
지문에서 하이데거는 명제적 진리가 본원적 진리로 환원될 수 없으며, 본원적 진리가 명제적 진리가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진리가 명제와 상태 사이의 대응으로 정의된다는 주장은 지문의 내용과 반대된다.  
지문에서 하이데거는 도구의 문화적으로 적절한 사용이 숙련된 실천 활동에서 드러나는 '도구적 진리'를 제시하여, 진리가 명제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구의 사용이 숙련된 활동과 무관하게 진리를 드러내며, 진리가 명제에만 국한된다는 주장은 지문의 내용과 상반된다.  
지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단순히 발생하기 위해 다자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것들이 이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다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연적 존재는 다자인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이해 가능성을 위해서는 다자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자연적 존재가 다자인 없이도 완전히 이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문의 내용과 모순된다.  
지문에서 일부 해석자들은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본원적 진리와 도구적 진리를 구분하지 않아 그의 사상을 오해한다고 비판받는다. 따라서 해석자들이 그의 진리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한다는 주장은 지문의 내용과 반대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인'과의 관계를 통해 '다자인'으로서의 본질을 상실하고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가능성을 획득한다.
- 하이데거는 자연이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현상이며, 과학적 탐구를 통해 드러나는 자연의 인과적 속성 또한 문화 의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하이데거는 '도구적 진리'를 통해 존재자가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는 방식이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본원적 진리'는 명제적 진리와의 대응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진리 개념을 계승한다.
- 하이데거는 자연적 존재의 이해 가능성이 '다자인'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는 과학이 자연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능력을 지녔다는 과학적 실재주의 입장과 일치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세인'과의 관계가 '다자인'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자인'이 '세인'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고 보았다. 또한 하이데거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다자인'을 통해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실재'와 '실재성'을 구분하며, 자연 자체인 '실재'는 문화적으로 상대적이지 않다고 본다. 또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드러나는 자연의 인과적 속성은 문화 독립적인 '실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본다.
- 하이데거는 '도구적 진리'가 문화적으로 적절한 도구 사용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진리가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고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 하이데거의 '본원적 진리'는 명제적 진리에 선행하는 조건으로서, 전통적인 진리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이다.
- 하이데거는 자연적 존재가 이해 가능해지기 위해 '다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과학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과학적 실재주의와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항상 개입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다자인(Dasein)"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를 의미하며, 이는 단순히 자아 충족적 주체로만 머무르지 않고 '세인(They)'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된다.
-"비은폐성(unconcealing)"은 하이데거가 제시한 진리 개념으로, 존재자가 이해의 장(field of intelligibility)을 통해 드러나는 과정이며, 이는 전통적인 명제적 진리의 선험적 조건으로, 진리가 단순한 논리적 대응을 넘어서는 방식을 설명한다.
-"과학적 실재주의(scientific realism)"의 온건한 형태는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과학이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게 자연적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의미 부여는 여전히 '다자인'에 의존한다는 관점을 나타낸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희망하는 주제를 던져주시면 선정해서 지문으로 제작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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