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삼환 [824224]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4-01-18 2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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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윤리] 노승월 선생님의 Killing Paper 모의고사 이의 제기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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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로 윤리 연구소’라는 N 카페를 운영하시는 노승월 선생님께서 제 킬링 페이퍼 모의고사 1회에 대한 여러 문제 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카페를 확인해 보니, 별도로 게시판까지 만들어 놓으셨더군요! 아무래도 아주 심각한 오류들이 많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류 시비를 거는 분이 계시니, 과연 타당한 문제 제기인지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1. “(엘리아데의 입장에서) 자연물은 눈에 보인다.”라는 해설에 대한 문제 제기



뭐 어쩌란 건지 잘 모르겠는 문제 제기입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① 선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일단 ①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스러움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물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엘리아데 O)” 이 선지가 틀리게 되려면, 엘리아데의 입장에서 성스러움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물을 통해 드러날 수 없으면 됩니다. 그러나 엘리아데에 따르면 성스러움은 눈에 보이는 자연물을 통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이 선지의 정오에는 문제가 없게 됩니다.


제가 해설에서 쓴 “자연물은 눈에 보인다.”에 대해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노승월 선생님께서 이 문장을 “모든 자연물은 눈에 보인다.”로 읽은 데서 기인합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쓴 문장 “자연물은 눈에 보인다.”는 “자연물은 대체로 눈에 보인다.”라는 명제를 표현하고자 의도된 것이며, 평가원에서도 종종 선지를 구성할 때 일반적인 평서문을 이러한 의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2학년도 9월 모의평가 17번 문항에서는 “ㄷ. 을: 시민 불복종을 하는 시민은 보편적 법치 원리를 존중한다.”가 싱어 O로 출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싱어가 다수의 견해가 진정으로 반영된 법에 대한 시민 불복종 역시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싱어가 볼 때 시민 불복종을 하는 시민이 언제나 보편적 법치 원리를 존중하는 것은 아닐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가원은 그냥 일반적인 케이스에 대한 진술로서 평서문을 활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아데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자연물은 눈에 보인다.”라는 문장을 쓴 것이 설령 엘리아데의 입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이유이며, 이러한 문제 제기가 제게 ‘문제 제기를 위한 문제 제기’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 선지와 해설은 2022학년도 EBS 수능완성 문제의 선지를 변형한 것으로서, 사실 노승월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 보셨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만 갖추고 있어도 정답을 맞힐 수 있다는 해설에 대한 문제 제기



웃자고 쓴 해설에 죽자고 덤벼 드시니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이런 것까지 문제 제기 글 목록에 넣어 두실까 싶기는 합니다. 진지한 대응을 원하시니 저도 진지하게 한 말씀을 올려 보자면, 이것은 노승월 선생님께서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의 개념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생긴 문제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는 해설에서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만 갖추고 있어도 J에게 비슷한 조언을 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을 갖추고 있어야 J에게 비슷한 조언을 할 것”이라는 말과는 분명히 그 뜻이 다릅니다.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조차 없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환자들 역시 이 문제에서 정답을 제대로 골라낼 수 있을 것이라는 노승월 선생님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만 갖추고 있어도 J에게 비슷한 조언을 할 것”이라는 해설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으시거든,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이 없음에도 정답을 골라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초적 수준의 양심과 도덕적 사고력이 있음에도 정답을 골라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반례로 제시하셔야 합니다.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의 개념은 수능 생활과 윤리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는 물론, 그냥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도 매우 유용합니다. 오르비클래스 이해황 선생님께서 관련하여 좋은 영상을 찍어 두신 게 있으니, 모두들 시청해 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3. 불교 사상에서 강조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에 대한 해설에 대한 문제 제기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불교 사상에서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기는 것이 연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설명이 틀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삶과 죽음이 모두 고통이므로 근본적으로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제 논리에 따르면, 늙음과 병듦 역시 삶, 죽음과 다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자가당착에 빠지고 계신데, 그건 생사일여를 ‘연기’로 설명한다고 해도 빠지게 되는 문제입니다. 늙음과 병듦 역시 연기에 따른 것 아닌가요?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삶과 죽음뿐 아니라 늙음, 병듦까지 모두 하나이게 되는 것이 뭔가 문제라고 생각하셨지만,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불교 사상의 입장에 부합합니다. 모두 연기에 따른 것이므로 넷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잠시 2024학년도 EBS 수능특강 윤리와 사상의 설명을 보고 가겠습니다.



연기의 원리를 현상 전체에 적용한 게 사법인설입니다. 그중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연기의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것이 결국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고통인 이유 자체가 연기의 원리 때문인 것이지요. 노승월 선생님의 설명도 맞으나, 삶과 죽음이 모두 고통이므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제 설명 역시 연기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틀린 설명이 아닙니다.


4. 롤스의 사회 구분 출제에 대한 문제 제기




8번의 ㄱ 선지에서 저는 롤스가 제시하는 ‘무법 국가’ 개념을 출제하였는데, 이것이 수능의 시험 범위를 넘어선다는 문제 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승월 선생님께서 최근의 평가원 기출문제들을 풀어보지조차 않으시는 게 아니라면, 아마 이 문제 제기는 실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서 무법 국가를 겨냥한 선지가 출제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노승월 선생님께서 진짜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셨던 선지는 ㄴ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저는 ㄴ에서 롤스의 ‘자애적 절대주의 사회’를 출제하였습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이것이 수능의 시험 범위를 넘어선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2023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 처음 등장했던 롤스의 ‘간접적 시민 불복종’ 개념도, 그 이전에 평가원 기출문제나 교과서, EBS 연계 교재에서 암시된 바가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저는 사설 모의고사에서는 개념적으로 좀 도전적인 시도를 해 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설 모의고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 이 개념이 수능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시는 건 노승월 선생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평가원에서도 예상치 못한 개념을 갑자기 불쑥 출제한 적이 몇 차례 있었으며, 이 개념 자체가 수능에 출제되든 그렇지 않든 이 개념을 학습함으로써 롤스의 해외 원조 이론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가 깊어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 1회 9번에 대한 문제 제기



1회 9번에 대한 노승월 선생님의 문제 제기 글은 카페 멤버에게만 공개된 글이어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의 제기 글을 자기 카페 회원들에게만 공개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6. 칸트의 성 윤리 문제에서 두 선지가 충돌한다는 문제 제기



저는 1회 11번 문항에서 “ㄱ.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성적 관계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와 “ㄷ. 성애(性愛)의 목적은 종족 보존이 아니라 상호 간의 인격적 교감이다.”를 칸트 X로 출제하였습니다. 둘 모두 출제 근거는 확실합니다.


ㄱ 선지의 경우 “⑤ 부부 사이의 성관계도 출산을 의도할 때에만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칸트 X) - 2022학년도 9월 모의평가 18번 문항”을 출제 근거로 하고 있으며,



ㄷ 선지의 경우 “생명에 대한 사랑이 인격의 보존을 위해 자연에 의해 정해져 있듯이, 성애(性愛)도 종의 보존을 위해 자연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이다.”라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의 구절을 출제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노승월 선생님의 말대로 양자가 충돌한다면 평가원 기출문제나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중 하나는 틀리게 될 텐데요.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할 책임을 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양자는 충돌하는 진술이 아닙니다. 성애의 목적이 종족 보존이라 하더라도, 매번 성적 관계를 할 때마다 출산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사랑 자체의 목적이 종족 보존이라고 해도, 종족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성적 관계를 맺으면 되지, 성적 관계를 할 때마다 출산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 두 진술의 양립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하시고 섣불리 문제를 제기하신 것 같습니다.


원전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만들었다는 식의 비난에 대해서는 사과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저도 나름 생윤 업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인데, 근거도 없이 이러한 모욕을 들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 출제가 원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면,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평가원 기출문제의 선지와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의 구절 사이의 충돌 문제(본인이 충돌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니)를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으신지, 본인이 이해한 바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7.  롤스가 볼 때 원초적 입장을 도입함으로써 공정한 합의의 절차가 마련될 수 있다는 해설에 대한 문제 제기



노승월 선생님의 이 문제 제기 역시 제 해설에 대한 노승월 선생님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원초적 입장에서 공정한 합의 절차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라고 적고 계신데, 저는 어디에서도 원초적 입장에서 공정한 합의 절차를 만든다고 적은 적이 없습니다.


롤스가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 상황의 설정을 도입한 이유가, 공정한 합의가 가능한 상황을 세팅하기 위함이라는 해설을 적은 것뿐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미 우연적 속성들이 다 오픈되어 있어서 공정한 합의가 불가능하니,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인 무지의 베일이 마련되어 있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 상황을 논의에 도입한 것이라고요. 해설을 좀 전체적으로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8. 1회 13번의 출제자의 코멘트에 대한 문제 제기



다소 황당한 글입니다. 이건 뭐 문제 제기는 아닌 것 같네요. 출제자의 코멘트는 지금 봐도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도 꼼꼼히 읽어 보시면 좋겠네요.


9. 윤리학의 분류 문항에 관한 문제 제기 – 1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메타 윤리학에서 ‘허용 가능한’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말의 의미를 분석한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대중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윤리학 교과서인 『윤리학 – 옳고 그름의 발견』(루이스 포이만 · 제임스 피저)을 읽어 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노승월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메타 윤리학에서는 ‘옳은’이나 ‘그른’ 등의 도덕적 언어의 의미를 분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옳은’은 ‘허용 가능한’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고, ‘의무적인’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무적인’은 의미상 ‘허용 가능한’의 부분 집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걸 탐구하는 게 메타 윤리학입니다. ‘허용 가능한’ 자체는 도덕적 언어가 아니라는 노승월 선생님의 의견은 일면 타당하나, ‘옳은’이라는 도덕적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허용 가능한’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허용 가능한’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메타 윤리학의 핵심적 과제라고 볼 수는 없을지언정, “메타 윤리학이 ‘허용 가능한’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분석한다.”라는 선지의 진술 자체가 옳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0. 윤리학의 분류 문항에 관한 문제 제기 – 2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기술 윤리학에서 ‘이론을 정립’한다는 저의 해설이 오류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단 2016학년도 6월 모의평가 1번 문항의 지문에 따르면, 기술 윤리학에서 어떤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런데 설명에는 어떤 설명 틀, 즉 이론이 요구되는 법입니다. 사회과학 연구는 어떤 개별적 사실들을 검토함으로써 일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기술 윤리학은 사회과학이 아니라고요? 저는 그러한 해석 자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술 윤리학은 인류학적 탐구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2019학년도 6월 모의평가)



노승월 선생님께서는 기술 윤리학과 사회학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계신데, 이러한 접근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서 도덕 관행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때 사회학의 연구는 기술 윤리학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윤리학 – 옳고 그름의 발견』(루이스 포이만 · 제임스 피저)라는 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기술 윤리학 역시 하나의 학문일진대, 이론을 정립하지 않는 학문이 어떻게 학문일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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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월 선생님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 근거 자료를 첨부하여 노승월 선생님의 문제 제기에 답변하였습니다.

아무런 근거 첨부 없이 그냥 “오류다”라는 글을 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글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첨부하여 답변하는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음부터는 좀더 신중하게 이의 제기를 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또한, 제 글에 추가적으로 반박하고 싶으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오르비에서 댓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질적으로 최근의 활동 회원이 노승월 선생님 혼자뿐인 노승월 선생님의 N 카페 말고, 많은 수험생들이 볼 수 있는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논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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