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씨에 무기언도
1963년 10월 13일, 당시에 야당지로써국민의 신망이 있었던 '동아일보'의
한 호외가 서울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때는 5대 대통령선거 불과 이틀을 앞둔 긴장된 순간이었다
민주당세력과 공화당세력간의 한판 대결이었다.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면
원대복귀하겠다던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여당공화당의 후보로 나왔고
이에맞서 야당에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범 민간세력의 대표로서 출마한것이다.
"1949년 2월 13일 군법회의에서 박정희씨에 무기언도."
윤보선 후보측의 폭로였다. 물론 이것은 어김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책을 읽는 어린세대들이 비록 박정희 대통령의 치세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막연한 소문이나 평가는익히 잘 알고있을것이다.
"우리민족의 도약적 경제발전을 이룩한 훌륭한 정치지도자"
혹은 "민주적 인사들을 가차없이 처단한 개발도상국의 전형적인 군사독재자"
"장기집권의 후유증으로 트로트가수와 여대생 앞에서 사관학교 동기생 친구의 총에맞아 절명한 사나이" "과단력과 비젼이 있었던 사람"
"부인잃고 주지육림에 빠져 걸핏하면 일본군가나 부르던 허약한 인간" 등등 무수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6~70년대 박정희 치세기간 동안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이러한 평가의 대상이 될수없는 절대군주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요즈음 사람들이 현 대통령을 평가하는 스타일로 친근하게 말할수있는 존재가아니었다.
그의 절대군주적 권력은 두가지 원칙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하나는 "잘살아보세"였고 또 하나는 '빨갱이는 안돼"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는 철저한 이념무장을 토대로 효율적 경제발전을 위해 모든 국가시책에 통합적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던것이다.
"반공"이란 문자그대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며 그것 자체로 독자적인 이념이 될수없는 부정적 개념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소멸되면 자연히 소멸될수밖에 없는 잠정적,방편적 개념이다.
경제발전도 좋은것이지만 정경유착이라든가 재벌의 비윤리적 성장, 대외의존적 취약구조,다국적 기업의 제국주의적 성격,도덕적 기강의 해이,공동체적 삶의 가치상실 등 여러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치세때의 두가지 원칙의 결합은 우리역사에 어떤 긍정적인 효용을 지니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효율적이었다 하더라도 "반공독재개발" 라고 하는 냉전체계의 모든 특징적 요소를 집약한 성격의 역사단계였음에는 틀림이없다.
바로 그러한 반공개발독재, 쉽게 말해서 우익독재정권의 수뇌가 바로 해방후 격동기에 우리나라 군대조직에 침투한 남로당의 주요고위간부였다는 사실,
그리고 소위 "여수 순천반란사건"과 연루되어 사형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요즈음 학생들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박정희의 경력은 정확한 사실이며 박정희 전기를 쓰는 좌파 지식인이나 극우 지식인이나 모두 자랑스럽게 밝히고있는 당당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을읽는 독자들은 누구든지 이러한 사실의 폭로가 당연히 윤보선후보에게 크게 유리했을 것이고 박정희 후보에게는 크게 불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재미있는 사실은 윤보선후보의 이러한 폭로로 인하여 오히려 인기가 역전되어 박정희 후보의 전폭적 승리가 확실케 되었고 윤보선의 대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좌우익 경력의 폭로로 끊임없이 총검과 죽창에 시달렸던 민중들은 그러한 시련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귀족자제 윤보선의 폭로보다는 오히려 빨갱이시비로 곤욕을 치르는 박정희후보에게 더 뼈저린 동정의 염을 표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정치사는 이념의 허울을 잠깐 걷어버리고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중층적 구조가 드러나게 된다.
박정희의 생애
박정희는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구미보통학교를 다녔고 1932년 대구사범학교 제 4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의 사범학교란 우리나라 백성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교육시키는, 우수한 교관을 양성하는 제도로서 매우 수준높은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5년제 학제로보면 고등학교급이라해도, 지금 사대를 졸업한 사람들 이상의 지적내용을 갖추게 되는 전인교육기관이었다.
물론 철저하게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야마토 타마시이의 인간으로 개조시키는 사상통제가 엄격한 교육내용이었음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당시 사범학교 학생들은 그만큼 프라이드가 있었다.
구미보통학교에서 대구사범에 입학생을 낸것은 11회 졸업생 박정희가 최초였고 6명의 동기생 응시자중에서 박정희가 유일한 합격자였다는 정황을 고려해보면
박정희는 굳건한 의지의 소년이었고,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수있다.
그러나 지린의 최고 엘리트학교였던 위원중학의 매우 자유로운 학풍속에서
중국말로 맥심 고리끼,루 쉰,홍루몽,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물들을 자유롭게 탐독하고
또 도산 안창호선생의 강연을 직접들으며 소년시절을 보내었던 김일성과는 매우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는것을 알수있다.
박정희의 보통학교 성적은 매우 우수했으나 대구사범시절에는 성적이 좋지않았고 결석이 많았으며 음울했다.
그러나 예정대로 1937년 대구사범을 졸업했고, 교사로 발령받았고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요새말로 초등학교선생님이 된 셈인데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3년동안 그곳에서 비교적 평온하고 아름다운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돌연 만주행을 결심한다. 만주행의 동기에 관하여 그가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떠나게 되었다는 둥 여러 사연이 있으나(장발사건, 나팔사건, 일본교사들의 집단구타, 박교사의 교장구타 등등)
그것은 모두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흔히 만들어지는 설화의 형태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만주행의 뚜렷한 목표는 그 본인의 고백대로 "긴 칼을 차고 싶어서"였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보통학교 6학년때 나폴레옹전기를 읽고 그를 몹시숭배했다. "긴 칼"이란 힘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권력의 추구, 그것은 그의 체질이었다.
만주를 간다해도 독립군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범학교에서 황국신민의 교육을 받은 박정희에게는 그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타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했고, 1940년 만주 신징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신징이란 위만주국의 수도로서 지금의 츠앙춘이다. 인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서 적성에 맞는 보람있는 시절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그는 만주 신징 라라툰에서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 "대동아 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사쿠라 꽃잎처럼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라는 어전강연까지 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육사 유학생대에 편입하는 특전의 영애를 얻는다.
만주군관학교에서 그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철저한 것이었나를 잘 입증해준다.
2년의 본과과정을 마치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다. 그후 견습군관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1944년 7월 1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자랑스러운
"황군 육군소위"로 임관, 만주군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육군소위로서
그 긴칼을 휘날릴수있는 타카키 마사오군의 시간은 1년 1개월 보름밖에 되지않았다.
해방을 맞은것이다. 군인으로서의 제 1차 좌절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최첨병으로서 악명이 드높았던 관동군소속 장교로서의 그의 삶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있다. 하나는 만주군 보병8단에서 정보장교로서 조선독립군투사들을 열심히 토벌했다는 설이고, 또하나는 그가 만군장교의 외관을 갖추고 실제로는 비밀광복군으로 암약했다는것이다.
두가지 설이 모두 낭설임은 말할나위도없다. 그의 황군장교경력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그는 별볼일없는 평범한 초짜 내근장교였고, 그가 뭐 독립군을 때려잡을 정도의 지휘관 위치에 있었던 인물도 아니다.
그리고 비밀광복군설이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일본군인으로 활약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국귀환을 위해 형식상 광복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런 허위사실이 수없이 날조되었는데, 그중의 한 픽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광복군이었다고 떠벌리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일본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좀 간파해주기 바란다. 20대의 타카키 마사오군은 그냥 충직한 황국신민, 일본군인이었다. 그것이 전부다.
해방후 근 1년동안 박정희는 화북지역에서 국민당군대의 포로생활을 했다.
박정희가 이 시기에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중대장 노릇을 했다고 사가들이 미화하고 있지만, 이때의 광복군이란 한국계 일본군인 포로를 처리하는 한 형식에 불과했다.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광복군은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숫자를 불려야했다.
박정희는 개인자격으로 1946년 5월 6일 미군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계급장도 없고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은 풀죽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서울까지 올라와 장충단 공원부근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낸 후 고향 선사으로 내려갔다.
고향의 친지들은 그 좋은 교사자리를 박차고 일본군인이 되었다가 졸지에 실직하고 돌아온 29세의 "걸뱅이," 타카키 마사오군에게 냉대의 시선을 보냈다.
박정희는 계급장 없는 후줄한 군복을 입고 잠은 친구들집에 돌아다니면서 자고 낮에는 백조다방에 죽치고 앉아있곤했다.
그렇게 서너달을 보내다가 노자를 얻어 상경했다. 그리고 열흘후,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포된것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러니까 나라가 생기기 전에는 국군이라는것이 있을수없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출범과 함께 국군이 정식으로 생기기 전에는, 미군정청 하에 소속된 임시적 군사단체만 있었다.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고, 6월에는 조선 경비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 "조선경비사관학교"라는 것은 바로 조선경비대의 간부양성을 위한 속성과정이였다. 2~3개월의 속성훈련을 받고 바로 장교로 임관하는데 자연스럽게 그 대부분이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군경력을 가진 사람들로 메꿔졌다.
박정희를 "육사 2기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은 대개 일본군인으로서 항일운동을 탄압하던 사람들이었다.
육사 10기생까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4년제 육사는 11기부터 출발한다. 11기에 바로 전두환 노태우가 들어있었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 14일 조선 경비대 소위로 임관했고 제2의 군인생활을 시작한다.
박상희의 죽음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재학하던 두 달 남짓한 시간동안에 인간 박정희에게는 너무나 슬프고 가슴아픈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이야말로 박정희의 생애를 전환시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박정희는 동희,무희,상희,한생,정희,5형제의 막내인데, 돌림자가 없는 한생은 요절했고, 나머지 세 형 중에서 셋째형 상희를 어려서부터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
박정희를 한 인간으로 볼때, 매우 검소하고 과묵하며,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않으며, 어떤 큰 삶의 비젼을 추구하는 태도가 분명히 있는 사람인데, 셋째형 상희의 인품의 훈도가 컸다.
상희는 상모리 주민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그 뒤 변변한 교육은 못받았지만 상당한 인텔리였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으며 좌익운동가로서 구미지역에서 꾸준한 활동기반을 닦았고, 구미면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고 신간회에도 간여했으며 해방후에는 구미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박상희는 동생 정희와는 달리 일관된 휴머니스트로서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정희로서는 자기 삶의 굴절과 좌절을 맛볼때마다 형 상희의 꿋꿋한 삶의 자세에 존경의 염을 지니고 있었을것이다.
해방후,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조직이 대치된 상황에서 미군정의 무지와 실정은 민중에게 엄청난 실망과 구체적 빈곤을 안겨주었다. 극심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하곡,추곡의 강제매입을 강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1946년 9월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 9월항쟁의 여파로 10월 1일 식량난이 특별히 심했던 대구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통 역사에서 "대구폭동"이라고 부르지만, 참 잘못된 용어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한 민중의 항변이었기에 "10월 대구 민중항쟁"이라 불러야 할것이다. 박상희는 10월 1일 대구민중항쟁이 터지자, 구미 경찰서로 달려가 오히려 잘 아는 그들이 걱정되어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외부에서 온 경찰들이 그를 쏘아 죽였다. 10월 2일이었다.
박상희는 10월대구민중항쟁의 역량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형 상희의 억울한 죽음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지 불과 일주일만에 접했다.
평생을 존경해오던 형님의 쓸쓸한 3일장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관학교 내에서 일체 그 비보에 관한 내색을 하지않았다.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분노의 심정을 가슴 깊이 형의 주검과 함께 묻어버렸던 것이다.
국방경비대조직 속의 남로당원
그리고 두달뒤, 46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했고, 47년 9월 27일에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했고, 48년 8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군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인품이 있었고 유능했다. 사범학교 엘리트코스를 거쳐서 일본육사까지 나온 그는 분명 당시의 우리나라 경비대수준에서 본다면 무게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시절에 박정희는 우리나라 국방경비대조직 속의 남로당원으로 암약했다.
지금 독자들은 현금의 우리나라 국군조직 속에 광범위한 조직망의 공산주의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가정한다해도, 그런 가정조차 상상하기가 어려울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남한의 대통령이 공공연한 남로당조직원의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시인하기가 어려울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빨갱이때려잡기에 열불을 올리는
우파권세가들의 바로 정신적 지주이며, 직접적인 뿌리라고 할수있는 대부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좌파혁명의 꿈을 꾸었던 사람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재 우리의 감각으로 저울질하거나 도색해버릴수는 없는것이다.
해방후 역사는 아직 반공이념이 국시로서 정차되기 이전의 시기였으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일반백성의 인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보안법적 저주의 대상은 전혀 아니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에 대한 생각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경직된 이념노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 군조직이었던 조선경비대는 체계적인 이념교육이 없이 급조된 조직이었으며 아무나 단시일 내에 그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나긴 항일투쟁을 거치면서 좌파계열의 사상훈도를 받은 다수의 사람들이 군조직 내에 배치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경비대의 군인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엄스러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미군정하의 권력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경찰이었으며 군인들이 아니었다.
경비대의 군인은 경찰의 보조병력적인 성격을 지녔었으며, 따라서 경찰은 군인들을 매우 깔보았다.
경찰들이 길거리에서 군인들의 따귀를 치고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는 모습도 쉽게 목격이 될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의 주체는 바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인탄압에 앞장섰던 친일경찰이었던 것이다.
조선경비대의 장교로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반체제적인 사유를 한다는 것이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통적 일본군인이었던 박정희에게는 미국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고, 미군정을 빙자하여 놀아나는 모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심리가 있었다.
형 박상희에게는 황태성, 그리고 이재복과 같은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이재복은 평양신학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에서 신학교를 나오고 경북지방에서 목사로 일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으로 해방후 경상북도 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들어갔다.
이재복은 박상희가 피살된 후 그의 유족들을 보살펴주었다. 박정희는 바로 이재복의 접선에 의하여 포섭되었다. 당시 이재복은 남로당 군조직 담당부서인 특수부의 책임자였다. 이재복은 대구에 주둔하고 있었던 6연대의 연대장 최남근 중령을 포섭하기 시작하여 군대 내에 광범위하게 남로당 조직망을 구축했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6기생출신이며 청렴하고 통솔력이 우수해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걸출한 인재였다.
스탈린:남조선 군대에 우리사람 침투현황은?
1949년 3월 5일 오후 8시,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회담한 내용을 전하는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적혀있다.
스탈린: 북하고, 남, 어느 군대가 더 강한가?
박헌영: 북쪽 군대가 더 강합니다.
스탈린: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조선소가 있지. 청진에 있었던가? 어느 딴 데 있었나?
김일성: 조선소는 없습니다.
스티코프: 있습니다만, 보잘것 없는 작은것입니다.
스탈린: 이런 점은 원조해줘야겠지. 조선에는 공군기도 있겠지.
스탈린: 남조선의 군대에 침투하고 있는가? 남조선 군대에 우리 사람들을 집어넣었냔 말이야
박헌영: 침투해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출시킬 수 없습니다.
스탈린: 그래 그 말은 맞아. 지금 노출시킬 필요는 없어. 남측에서도 분명히 북쪽 군대에다가 자기사람들을 심어놓았을 거야. 세심한 주의를 하게.
이때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쌩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남쪽의 군부 내에 공산당조직은 다 노출이 되었고, 침투되었던 세포가 모두 괴멸되어버렸다. 바로 남쪽 군부 내의 공산당 조직을 괴멸시키는데 수훈갑의 공로를 세운 인물이 다름아닌 박정희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살아 남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변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우리는 흔히 "여수 순천반란사건" 이라고 부르는 1948년 10월의 비극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여순항명사건"은 "4.3 제주민중항쟁"(보통 "제주폭동"으로 잘못 불러왔다) 과 유기적 관계가 있다.
출처 : 논술과 철학강의 (저자 도올 김용욱)
상당히 많이 참고했습니다. 요약하는 능력이 없어서 거의 배낀수준입니다.
나머지는 오늘저녁이나 내일쯤에..
전 박정희의 혈서사건의 진실이 정말 궁금하네요
여기까지 요약해보면
보통학교->황국 신민을 기르기 위한 사범학교 -> 만주군관학교(여기서 부터 완전 일본인) -> 일본육사->포로 -> 다방백수 -> 조선경비사관학원(육사 전신, 2개월 코스) -> 형 죽음 -> 국방경비대 장교-> 남로당 가입
다이나믹 하네요
대충 어떤 마인드로 살았는지 짐작이 가네요
일제시대에 태어나 어린시절엔 스스로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도 없었으며 이십대 초반엔 권력을 찾아 자신의 조국 일제의 군인이 되고자 했고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큰 칼을 차기 위해 조선경비사관학원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었군요.
태어나서 내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 했다고 봅니다 저는
식민지 시대라고 무조건 투쟁으로 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소수이지만 위장 친일파로 해서 독립군에게 지원을 해주던 부류도 있었고요
위장친일파 얘기까지 꺼내시며 변호하실 필욘 없어요
제 댓글에도 박정희가 잘했다 못했다 이런 표현 안 쓰고
가치중립적으로 썼어요~
풉~
(가치중립적인 댓글)
킥킥
아 죄송해요 님이 박정희를 깠다고 제가 변호한거 아니에요 저 박정희 빠돌이라서 원래 좀 박정희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ㅎㅎ
민족반역자 빠돌이인 민족주의자라...
국가주의자 아닐까요 (비꼬는 거 아닙니다)
위장친일파 얘기는 박정희가 위장친일파가 아닌 이상 별 의미가 없지요.
일단 박정희는 친일 행적이라 해봐야 군관학교 간 정도 밖에 없어서 좀 애매합니다.
군관학교 간 정도만으로 통상 친일파로 따로 분류하지는 않는데, 박정희는 대통령까지 되었기 때문에 사후 분류된 경우에 가깝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꽤 애매하지요.
혈서까지 써서 간 걸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엔 충분해 보입니다만....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 등을 모델로 한국을 군국주의 일본 같은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튼 박정희의 행보는 그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는 것만큼은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애국애족의 영웅이라 하기는 무리겠구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정희의 친일행적은 확증이 없습니다.
만주군 중위가 친일이라고 부르짖는 놈들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워지고 나서죠 얼마나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고 싶었으면 중위까지 기준을 낮췃겠습니까? 중위가 친일이라면 왜정당시에 읍면사무소장도 친일입니다..네..그리고 혈서드립이 박살난지가 언젠데..그러십니까..
아 물론 박통이 권력지향적인 인물인건 맞습니다.
근데 그게 잘못되었나요?권력지향적인 인물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아나키즘이 만연하겠죠.
그리고 애국애족의 영웅이라고 하기에 무리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박통이 애국애족하지 않는다고 하면 시바스리갈도 마시지 않았겠고요,그린벨트 지정도 하지도 않으셨겠고,조림사업도 안하셨겠고,새마을 운동도 안하셨겠죠...그냥 자기 배 부르고 여자랑 희희낙락 연산군마냥 풍악 울리고 잘 먹고 잘 살았겠죠...피격 당시 사망진단의의 증언도 있고요...
제 생각으론 박통이 자기안위만 생각하는 리더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아, 일본군 군관학교 가고 결국 일본군이 된 건 사실이죠. 친일적 행위라고 볼 수는 있는데,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기준에는 미달한다는 얘기....
다만 그의 행보에서 그의 인격과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고 그의 행보에 대한 가치판단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혈서 얘기는 박살나진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저번에 오르비에서도 나왔던 얘기(뭐 어차피 그닥 중요한 얘기도 아닙니다).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권력을 위해 도의를 저버리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했다거나, 민주국가의 기본적인 질서를 파괴했다거나, 무고한 인명을 희생하고 인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바스리갈과 애국애족의 관계가 무엇인지 의아하구요, 그 뒤에 님이 얘기하시는 부분은 박정희가 직접적인 사익을 추구하는 predatory dictator의 성격보다는 국가발전을 추구하는 developmental dictator의 성격을 더 강하게 지녔음을 주장하는 것일 뿐, 그의 애국애족을 입증하는 주장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압니다.
애국애족이라는 말을 어찌 보냐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애국애족도 애국애족이라면 애국애족입니다. 이러한 애국애족도 애국애족이라 한다면 박정희도 애국애족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말한 '애국애족의 영웅'이라는 표현에서 얘기하는 진정성이 그런 류의 진정성이 아님은 부연하지 않아도 되겠지여.
100년 200년 쯤 지나고 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듯합니다.
좌파 우파 매국노 따질 것 없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1人,,, 뭐 이런식으로?,,
똑같을 겁니다. 기존의 사료를 뒤집어 엎을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제 말은 매국노에 대한 인식이 뒤바뀔거란 얘기죠
개인주의가 워낙 심화되가는 세상이라 먼 미래에는 애국?이란 말이 사라질 듯해요
걍 조낸 열심히 살았구나,... 대단하다... 이정도로 될 듯?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용납해서는 안될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애국이란말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ㅋㅋ
똑같을 겁니다.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이 유물이 될 먼미래라도, 강자의 탄압에 동조하는 한편 약자에 대한 착취에 숟가락을 얹는 배신행위를 지탄할 도덕적관념까지 사라지지 않는한.
님 입장에선 똑같겠죠. 만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이미 확정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역사적 사료에 기반한 평가는 이미 끝났죠. -_-
박쥐인생
물론 일제강점기라 해서 모든 조선인이 무조건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쳐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단 한번의 삶만이 주어지고 그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시대나 국적 그리고 다른 상황들은 그의 삶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된 것처럼 임의로 주어진 거니까요.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요 60년 대한민국의 역사중 1/3에 해당하는 기간동안 이 나라를 쥐고 흔든 사람이기도 하며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 중 한명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인 박정희에 대한 세상의 평가 기준은 일반인들에 대한 평가 기준과는 달라야만 합니다.
제가 댓글에서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팬들이 제 댓글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보더라도 박정희의 과거가 대한민국 정치 스타의 과거라 하기엔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그의 태도와 행적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과거로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 당연합니다. 민족주의에 기초한 현대 국가의 수장이 한 때 본인을 일본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라뇨.
그런 사람을 나라를 미친듯이 사랑했던 야심가라 미화하는 사람들이 우스울 뿐입니다.
저기, 제가 잘못 말한거 같은데요 박통이 위장친일파였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부류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친일을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았던 인물에게 친일의 멍에를 왜 씌우는지 전 이해가 안될 뿐입니다.
박통이 위장친일파였다고 받아들이지 않앗어요~ 뜬금없이 위장친일파 애길 꺼내시길래 무리하지 말란 의미에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박통에게 친일의 멍에를 씌우는 게 아니라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라는 인물은 '친일'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본인을 일제의 신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친일이랑은 조금 다르죠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고 나아가 자신의 조국 일본의 군인이 되고자 했던 이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끔찍이 아꼈던 사람인 마냥 우상화 되고 찬양되는 것이 우습단 얘깁니다.
와나 진짜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놀라운 댓글들이 좀 있네요.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 모두가 출세를 위했고,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를 댄 놈들도 널렸어요.
저정도면 변호가 아니고 아예 국가관이나 정치관 자체가 완전히 '어거지'네요.
친일파들 모두를 국가를 위한 사람으로 쳐줄 기세
김일성 신격화랑 다를게 없다니까요 ㅡㅡ...
경제 성장의 발판의 마련해준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집권말 당시 경제 상황 정말 좋지 않았고
또 하나 일제치하 초등교사란 직업이 나쁘지 않았지만 포기하고 만주 군관학교 입교했죠
연령 제한때문에 불가능하자. 황국신민의 충성도를 보여주기 위해 사실 혈서를 쓴거죠. 그리고 해방이후에 남로당
원이되고.. 이런 행적들은 존경의 대상이라기 보다 처세술이 짱이구나 라고보면 된다고 생각함.
근사가 뭐 처세술 베우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10.26이후 법정 김재규 진술보면 알겠지만 그의 부정적인 측면은 아직 많이 까발려지지 않았죠.
주변에서 박정희 관련 진술은 대부분 하지 못하도록 막았고..그걸위해
김재규를 의도된 행동이 아니라 우발적 범행이라고 몰았죠.. 암튼 사료나 자료가 더 많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파 문제는 매우 난해한 문제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때는 일본이 조국이었다'식으로 퉁치면 좀 곤란한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북한 지도부도 조국 북한의 현실에 맞춰서 시키는대로 산 것 뿐이지요.
뭐가 곤란한데요?
아니 그러면, 태어났는데 자기가 발 디디고 있는 조국이 빨간색 원이 있는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데 뭘 합니까? 도대체?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요. 퉁친다니요? 그건 퉁치는게 아닙니다.
무슨 미합중국마냥 여러국가가 붙어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북한 지도부, 얘들 노동당 규약이라는 현실에 따라 맞춰 사는거 맞아요. 그럼 아닙니까? 주체사상이 걔들한테는 목에 걸려있는 칼마냥 받들어 사는데....
그걸 깨부셔야 하는게 우리가 해야할 일이구요
친일 안 한 사람 호구 만드시네요
아뇨 호구만드는거 아닌데요
참 극단적으로 생각하시네요
항일운동하신분들은 당연히 존경하고 떠받들여야죠
근데 적극적 친일을 안한 사람을 비난하는건 지양해야된다는거죠
태어났는데 일제->친일 안 하면 뭘 해?->여기서 당연히 항일은 부정적인(혹은 비정상적인) 거라는 의미가 나오죠 그냥 문맥상 나온 건데 저한테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뇨 님이 표현을 (님 생각과 다르게) 잘못했을 순 있겠죠 적극적 친일이란 표현이 나왔으니 소극적 친일이란 표현을 쓸까요? 소극적 친일을 한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거죠 게다가 공직잔데) 그리고 그의 독재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는 것도 대단히 웃긴 일이죠 저도 밀이랑 비슷한 입장이라 정당한 목적과 시기 내에서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박정희의 독재의 모든 면이 정당한 목적과 그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우스울 뿐이죠ㅋㅋ 그를 높이 평가하는 건 상관 없는데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합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솔직히 민족주의자라는 닉을 쓰는 분이
"태어났는데 자기가 발 디디고 있는 조국이 빨간색 원이 있는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데 뭘 합니까? 도대체? "
라는 말을 하다니 너무 쩔어서 혀가 굳을 정도네요
유영철이 '간디처럼 살고싶었다'고 말하는 걸 듣는 정도의 역설?
민주주의 이념과 질서에 반하는 헌법파괴자적인(헌법 교과서 30분만 봐도 느끼는 바가 있을 거에요) 면을 보인 인물인데 그런 점까지 쉴드치는 모습은 논리가 결여된 종교인의 모습이죠 유신헌법 때 도왔던 (모든 법은 법학자들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서 만들어집니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달라는 요청도 자주 들어오구요) 헌법학자들은 지금도 죽어라고 욕을 먹고있구요 학자로서의 모든 명예를 잃고 바닥으로 추락함(법학도에겐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아이콘으로 남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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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박정희를 까는 얘기가 됐는데, 제가 많은 면에서 박정희를 까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측면도 있습니다ㅎ..
그래서 님은 북한 지도부도 죄가 없고 도조 히데키 같은 일본 군국주의 전범도 죄가 없으며,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에게도 죄가 없다는 소릴 하는 겁니까?
파시스트가 따로 없군요.
개별 행위자는 구조의 제약 안에서 행위하지만 또한 그 구조 하에서 나름의 자율성도 지닙니다.
경우에 따라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뻔뻔하게 책임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박정희의 경우는 생계형 친일도 아니지요.
범죄에 가담해 떡고물을 얻어먹은 이에게 죄가 없을 수 있습니까?
진시황: 혼란한 전국을 통일하여 중국역사상 최초로 황제자리에 오름. 분서갱유를 단행하여 문화적탄압을 하였으나 도량형통일, 만리장성축조로 향후 중국의 2000년역사의 기틀을닦음.
한무제: 현중국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상의 한 인물로써 한고조의 마누라인 여태후위 전횡으로 국가의 혼란을 친히목격하고 역모가 의심되던 태자와 태자의 장인,장모는 물론 그와관련된 모든 인물을들을 처단하고, 한나라의 장구한기틀을마련한다.
당태종 : 세상을구하고 백성을 편안케한다는 뜻을가진 이세민도 중국인들이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동생 및 그 일당을 제거하고 중국역사상 가장 번영한 당나라의 기틀을 세운다(정관의 치)
이방원: 제1,2차 왕자의난을 진압하고 사병혁파, 법령개정, 신문고설치등 500년 조선역사의 기틀을 닦음.
영조: 치열한 당쟁속에 생명의 위험을 겪어가며 왕위에 올라 탕평책실시, 민중의 인권제고, 산업, 문화,예술의 중흥기를 마련함.
박정희 : 5.16군사의변을 단행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실시, 강력한 자주국방, 녹색혁명으로 국민의 배곪음해소, 새마을운동으로 농촌근대화실시로 부강한 대한민국으로가는토대를마련.
이상의 인물을 살펴보면 강력한카리스마로 혼란한 사회를 통일하고 국가번영의 기틀을 닦았으며 그 과정중에 그와 상반되는 정적들은 제거되는 양상을보여줌. 한마디로 난사람들이다.
결론은 시대는 영웅을낳고 영웅은 시대를 만든다는것이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떻던 후대에국민의 사랑과 존경을받고 역사에 기리 남는다는것이다.
박정희를 폄하하는 종자들은 참고하시길…
첨언하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도 당대와 짧은 사후에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햇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 이후에 또 좋은 평가를 받는 정조도 희대의 욕쟁이라고 하고요...
전근대 군주와 공화국을 뒤엎은 독재자를 같은 수준에 놓다니.
님 얘기대로라면 박정희는 전근대 군주에 불과한 인물이군요.
시대착오적인.
대한민국이 왕국이고 박정희가 왕인가요? ㅋㅋㅋㅋ
이승만이 대통령 됐을때 많은 사람들이 왕처럼 여겼다죠
대통령이라는 제도를 체험해봤어야 대통령이 뭔지 감을 잡죠 ㅎ
박정희때는 세월이 지나긴 했지만 교육받은 사람이 아닌한 비슷한 개념으로 여겼을거같습니다
그래서 근현대사에 대학생들의 활약이 컸나봐요
작성자인데 반응들이재밌네요ㅎ
나머지는 내일 6평 보고와서 타이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