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에겐 강하게, 약자에겐 부드럽게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누군가 나를 툭, 하는 느낌보다는 좀 더 세게 내 머리를 치고 갔다.
내가 불렀다.
"어이 아저씨"
"왜요?"
"치고 갔는데 사과 안 해요?"
"뭐?(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말이 짧다.)"
"치고 갔는데 사과 안 하냐고(당연히 질 수 없다.)"
"(잠시 생각하다) 내가 일부러 쳤어요?"
...........................
"강자에겐 강하게, 약자에겐 부드럽게"
어느 만화에서 간신배로 그려지는 전형(典型)은 바로 강자에겐 비굴하고 약자에겐 강한 자이다.
십상시가 그랬고, 기자헌이 그랬으며, 강태가 그랬다.
난 저 프레임 자체가 역겨웠다. 누군가에게 저렇게 비추어지는 기분은 무얼까.
반대로 살겠다. 강자에겐 강하게, 약자에겐 부드럽게.
듣기 좋은 저 레토릭은 사실 뜯어보면 허울만 좋은 경구다. 굳이 강자에게 강할 필요도 약자에게 부드러울 필요도 없다. 옳고 인자한 강자에게 센 척할 이유도, 기회만 노리는 비열한 약자에게 선하게 대할 이유도 없단 말이다.
실은 약자라고 악(惡)하게 함부로 대하지 말고 강자라 해도 옳지 않다면 주눅들지 말고 할 말 하라는 그 말일 뿐인데 난 주객을 전도시켜 말그대로 강자에게 센척을, 약한 자에게 부드러운 척을 해왔다.
예컨대 이렇다.
나같은 소시민은 러쉬아워 지옥철을 애용하는데 모인 온갖 사람들은 저마다 신음한다. 숨쉴공간, 핸드폰 들 손조차 없는 그 퀘퀘한 분위기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고 엉덩이를 터치하고 머리냄새를 맡는다. 그 불편함이 싫어 최대한 옆쪽으로 비켜있어도 인해(人海)는 밀려온다. 그러다 내 발을 밟고, 누군가는 가방으로 앉아있는 내 머리를 후리고 간다.
그 때 내 대응기준은 이렇다. 만약 그 대상이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여자라면 그냥 속으로 욕하고 넘어간다. 인상도 안 찌푸린다. 그들은 내 기준에서 약자다. 그런데,
만약 내 머리를 팔꿈치로 후리고 간 군상이 키 180넘고 덩치는 산만한 어떤 거한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를 만만하게 본 건가"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이쯤되면 가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러서 말한다. 사과하라고.
90%는 대부분 찌푸린 표정으로 "미안합니다."라고 하고 넘어간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건 내게 중요치 않다. 오늘 처음만난 사람들끼리 갖기엔 그건 사치스러운 감정이고 다만 형식적 완성도만 체크하기로 한다.
위의 저 일화는 나머지 10%, 그러니까 오늘 일어났던 일이다.
일부러 치지 않았으니 책임이 없다. 는 말이 되지 않는다. 법도 과실을 죄로 규정하니까.
미필적 고의까지 들어가면 범위는 더 넓다. 그럼에도 이 새끼는 나를 면전에 두고
저렇게 책임 회피, 말하자면 싸우자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더 말하면 사람들이 쳐다볼까 부끄러웠다.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웃고 말 수도 있었다. 머리를 친 게, 사실은 아프지는 않았고, 상처는
더욱이 없다. 나도 업무 잔뜩 출근길에 이런 곳에 에너지 쏟을 여유도 없다.
"이번 역은, 서초. 서초 역입니다."
지하철 3-4칸 왼쪽 8열좌석 2번째에서 옆사람 발을 조심스레 피해가며 일어난 나는 선반 위 올려둔 무거운 서면봉투와 노오트북을 들고 조심조심 걸었다. 그 때 놈이 광배근 가득 보이는 어깻죽지를 내 눈 앞에 드러내듯 서 있었고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내가 이대로 가게 되면 혹시 내가 피하는 것은 아닌가?
강자에겐 강하게. 내 어릴 적 모토에 의하면, 난 더 세게 대응해야 한다. 라는 잡념이 스치며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 아까 그냥 넘기기로 정리했는데 잡념이 겹치니 생각이 달라졌다.
소심한 나는, 쪼잔해보일까 아까 일을 다시 꺼내지는 못 하고 지나가며 슬쩍 밀었다.
"어어?"
그 놈은 소리를 한 번 내더니 나를 봤다.
이내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 밀었는지를.
이번엔 그 놈이 나를 밀었다. 난 휘청였다. 내가 당황스러운 그리고 매우 분노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그 놈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너 미쳤냐는 말과 함께.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
그 놈은 약 5초간 나를 응시했다. 아무 말이 없었다. 턱을 잡힌 상태에서 무대응한 것은 아까 밀친 행위로 보아 참은 것은 아니다. 놓아주고 이야기했다. 똑바로 보고 다니라 했다. 그러고 내렸다. 이 모든 게 1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내리면서 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 밑 부분을 쾅쾅 쳤다.
왜 이러는가.
왜 이랬을까.
좀만 참을걸.
누가 보진 않았나.
경구의 자의적 해석이 이런 모닝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걸 감내하며 걸어가는 사이 누군가 뛰어가며 또 내 밟을 밟고 갔고, 어제 닦은 구두에 선명하게 신발자욱이 남아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지 보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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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봐주어 고맙습니다. 교훈, 영감 따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기입니다.
일상 속 감정 서술도 필력이 더해지면
수려한 글이 되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자주 보이네, 좋게 봐주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