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PineTree) [50039] · MS 2018 · 쪽지

2007-06-15 19:50:07
조회수 21,050

5년 동안의 저녁 밤하늘. (3수) -악몽-

게시글 주소: https://cheetar.orbi.kr/0001440760

■ 3수- 악몽.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몇 달을 보내다가 서울행 기차를 탔다.

재수 생활을 보람차게 보낸 경험이 있기에,

다시 한 번 1년을 보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의 ◯◯학원에 등록했다.

많이 알려진 ‘메이져’ 학원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내 자신을 위해서도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다.

학원에 간 첫 날. 자리에 한번 앉아 보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불안 했다.

그 때 느낀 느낌이... 맞았을 줄이야. 나는 알 리가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꿈 아닌 꿈들을.















서울에서도 가장 물가가 높은 지역이라서 방값도 엄청났고 학원비도 비쌌다.

이런 곳에서 도전하는 만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방 값이 비싸서 고시원을 선택 하기로 했다.

그래도 식사가 나와서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고시원에서 살았는데 옷을 합성세제로 빨아 줬는데 너무 대충 빨아서인지 옷에서 세제 냄세가 났다.

그리고 피부가 아팠다.

입으면... 따가웠다.



(고시원...입구)

더구나 밤마다 게임을 하고 크게 떠드는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괴로웠다.

방은 정말 내가 누우면 책상 밑으로 누워서 자야할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역경을 이기기로 마음 먹었지만,

밤마다 크로캅 경기를 보면서 벽에 하이 킥 연습을 하는 키 2미터,

몸무게 3자리의 ‘재수생’학우와 (아..정말 사이코였다...)

내가 태어나서 경험한 가장 큰 코고는 고시원 아저씨는

매일 잠을 설치게 만들었고,

3월 중순 쯤부터 나는 정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귀마개도 끼고 온갖 방법을 동원 해 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더욱 걱정 되었던 점은 서울권 학원은 저녁 10시가 되면

자습을 할 수 없었다.

전에 있던 학원은 11시~12시까지 자습이 가능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수업도 지방학원보다 적었다.

토요일은 수업이 아예 없었고,

나중에 알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질문을 하려

교무실에 가면 이미 선생님들이 퇴근하신 경우가 많았다.

질문을 많이 하는 나는 힘들어졌다.

더구나 자습시간도 줄었는데, 고시원 환경은 집중이 잘 안되었다.

옆방에서는 PS2 게임을 즐기고 있고,

화투를 치는가 하면,

역시나 벽에 [하이 킥] 연습하는 놈도 있었다.

고시원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자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혼자 사시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엄청 외롭다.

거기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해져서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공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학습효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해서 몸이 무거웠다.

학원에서 수업을 3월부터 시작 했고, 나는 작년처럼 열심히 공부 했다.

다만...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사탐을 하지 않게 되었고,

과탐 4개를 집중해서 치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어떤 식으로 시험이 출제 될 것인가...

언어를 제외한 모든 영역 난이도가 급상승 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시험 과목이 줄어들어서 더욱 변별력을 가지게 함이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려고 노력했다.

첫 모의고사를 쳤는데 점수는 444점이었다.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450점은 넘을 꺼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444라서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 였던게, 언어영역 배점이 120에서 100으로 줄어들었고,

수학은 80에서 100으로, 외국어도 80에서 100으로,

과탐이 120에서 200으로 늘어서 배점이 모두 커진 점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수학과 , 영어의 배점이 올라간 건

참으로 바람직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큰 타격은 언어영역 배점이 줄어든 것이었다...

만점이라도 20점 획득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는데 440점이 꽤 높은 점수 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400점 만점에서 340과

500점 만점에서 440점대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감을 잃었다.

처음 500점제도를 접한 나는 점수 감각 자체가 없었다.

440이면 시작으로는 좋은 출발인데 지금 생각으로는...

그때는 자신감만 잃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너무 공부를 잘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에 비해서 원래 실력이 좋기 때문에

메이져급 학원의 성적이 좋게 됨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땐 몰랐다.


명성에 비해서 학원 선생님들은 실망을 크게 하게 했다.

모두 항상 상위권들만 가르쳐서인지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 선생님이 많았다.

좋은 선생님도 계셨지만, 대부분이 매너리즘에 걸린 듯

대충대충 가르치시는 분이 많았다.

여전히 나는 모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도리어 이게 독이 될 줄이야.

내가 수업을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선생님에게 배워

실력이 크게 오르지 않음을 느낀 건 너무 늦은 때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험생 분들에게 어떤 수업이든 일단 처음부터 열심히 들었

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열심히 듣다가 아. 이건 나에게 안 맞구나 느끼는 것하고,

아예 처음부터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은 큰 차이다.

자신의 스승을 항상 찾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정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다른 스승을 찾아서 공부를 따로 하는 듯 했다.

학원영어 선생님은 3분이 들어오셨는데 도무지 만족 할 수 없었다.

정확히 영어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 한 것은 4월 정도였다.

어려워진 7차 영어에서 나는 85점 정도의 성적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학원 수업에 열중 했지만 독해하고 해석,

뭔가 불규칙하고 난해한 어법을 간간히 가르쳐 주는데

실제 실력의 증강과는 거리가 먼 수업.  

그래도 아직 4월 이라서 괜찮다고 생각 했다.



5월 정도 까지 고시원에서 잠을 설쳤던 것 같다.

너무나 괴로워서 못 참아서 원룸으로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방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나는 부모님께 너무나 미안했다.

그래서 가격이 저렴한 방을 구해서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더 이상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악몽의 전초였다.




내가 옮긴 곳은 원룸이었는데 약간 누르스름한 방에

화장실이 아주 낡아서 시궁창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하수구 근처라서 화장실 냄새가 지독했고...

최악은 모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6월. KICE에서 모의고사를 쳤는데 내 영어점수는 76점이었다.

바뀐 영어에서 압도적인 난이도에 무너져버린 나는...

영어가 큰 문제라고 느꼈다.

언어는 여전히 잘 나왔고, 수학도 1등급-96점 이었고

과탐도 1~2등급 사이였다. 영어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문 기초 영어’를 다시 정확하게 완독 했지만

그래도 영어 점수는 오르지 않았다.

너무나 답답해서 영어를 잘하는 학원에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성문종합, 맨투맨... 뭘 해야만 할까.

그 동생은 인터넷 강의 선생님을 추천 해주었다.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선생을 들었다.

기초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6월 이후 학원 수업은 거의 문제 위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학원 광고에 나오는 [원리], [기초]의 설명은 잘하지도 않았다.

질문을 하면 ‘왜 이런 걸 묻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선생님이 많았다.

[학원 광고] 와는 거리가 먼 진실이었다. 너무나 실망했다.

기초를 더욱 탄탄히 하고 싶었는데 문제 풀이위주로 계속 수업진행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미 공부가 되어 있는 학생들만 건져 내겠다는 느낌이었다. 나에게는.

물론 다른 재수학원을 다녀보지 못했다면

이런 느낌도 받지 않았겠지만... 참으로 씁쓸했다.

학생을 보지 않고... 서비스를 주는 손님으로만 보는 ‘강사’들.

스승으로 삼을 분은 참으로 적었다.

정말 슬펐다.

더구나 처음 타지생활이다 보니 너무나 너무나도 외로웠다.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생활은 버티고 있지만

오르지 않는 성적은 나를 조바심을 내게 만들었다.

오르지 않는 학습효율...

열심히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얻는게 적다는 느낌이었고.

인강과 비교를 하면 할수록 비싼 돈을 내고 왜 학원에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

(학원 선택을 할 때는 꼭. 자신의 발품을 팔고 조사를 열심히 해서...

자신에게 맞는 선생님과, 자습 환경이 자신에게 잘 맞는 곳임을 확인 했으면 한다.)



(내가 저녁에 홀로 밤거리를 걸으면서 종종 보게 되었던 이 길.

나는 이 글자가 ‘일방통행’ 으로 보이기 보다는 먼저 밑에 ‘2000’이라는 숫자가

있고, 그 위에 글이 보였다. )


7월이 되어 영어 시험을 쳤는데, 여전히 80초반의 점수였다.

도무지 안되서 과외수업을 받기로 했고, 과외를 받았지만...

영어가 그렇게 늘지는 않았다.

입시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k선생님의 강의를 알아내고 들었는데 이제야 스승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갔고, 영어의 새로운 시각을 뜨게 해줬다.




말 그대로 단어만 알고 그냥 막 해석해서 답 찍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강의에서 길이 보이는 듯 했다.

문제는... 학원 수업이 너무나 답답했다.

학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말 도박이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점수를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인간미 없는 선생님들과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8월 중순이었고, 점수는 3월에서 제자리였다.

시험은 모두 어려워 졌는데, 실력은 오른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점수를 올릴수 있을까....

학원을 나왔다. 더 이상 비싼 학원비를 안내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공부할 압축 전략을 세우기로 했다.

모든 진도를 남은 기간에 한번 돌리기로 했다.

‘점수를 못 올리면 죽는 거다.’ 내 머릿속은 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공부에 빠져 들지는 못하고 계속 모의고사 점수만 보고 있었다.

나중에 언어영역 스승님의 말씀대로

‘공부를 즐겁게 만들고 거기 빠져라.’ 라는 것은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수능이 코앞이었다. )




수학은 한석원 선생님,

영어는 타미 선생님, 과탐도 각각 선생님을 정해서 인강을 듣고,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에서 독학 하기로 했다.

이건 승부였다.

마지막 승부라고 크게 써붙이고 공부를 시작했다.

9월 Kice 시험이후 (약 440점) 나는 아직도 ‘영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학도 문제 였다.

9월 수학은 3등급인가가 나왔다. 과탐도 그렇게 좋은 성적이 아니었다.

언어만 1등급이고 모든 등급이 거의 3등급이었다. 그나마 영어는 2등급으로 올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공부를 거의 못한 느낌이었다.

모든 과목이 불안해졌다.

6월 시험-수학 96 9월 수학-76 실제 92점은 받을 수 있었는데

떨어진 감과 느린 계산, 말 그대로 불완전한 실력이었다...

남은 건 약 두 달 반. 나는 엄청난 압박감에 매일 시달렸다.


다만... 욕심이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독학이 그렇게 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아무도 나를 제지 할 사람도, 환경도 없다.

잠을 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무한의 자유.

그 속에서 공부를 스스로 해야 하는데, 사람은 혼자 있으면

정말 쉽게 나태해진다는 것을...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도 안되는 빡빡한 계획보다

공부를 약간씩 덜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무리한 계획이었다...)

나는 그걸 자책하면서 모자란 양을 채우기 위해서 밤을 지새려고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고, (이미 정신에 무리가 가서 더욱 그러했다.)

자신에 대한 분노로 참을 수 없었다.

스트레스를 참을 수 없어서 컴퓨터를 켜고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쌓인 분노를 스타를 연구하면서 풀었다.

스타와 함께 오르비 오락실구의 ‘쿠타 게임’중 찬바라 인가? 라는 게임

도 같이 했는데,

이것도 죽을 때 마다 마치 노력이 부족해서

공부가 안되는 것 같은 내 자신을 보여 주는 느낌이라 계속해서 도전했다.

정말 바보 같은 집착이고 생각 이었지만... 패닉은 더해만 갔다.

문제는... 그렇게 게임을 조금 하고 나서는 시간을 또 게임에 날렸다고

혼자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괴로워하다 공부를 또 한 뒤 또 계획량을 못 채웠다고

혼자서 자책하고 다시 컴퓨터를 켜서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그런식으로 주기가 반복 되었는데...

계속 하다 보니 하루 종일 공부하고 그다음 하루 종일 스타 하고

이런 식이 매일 반복 되었다.

당연히 학습효율은 형편없었다.

100일도 채 안남은 것을 안 상태에서 한 독학이었기 때문에

조바심과 압박감은 정말 엄청 났는데,

그 와중에 스타하고 공부하고. 더구나 스타를 재미로 한다기 보다는

조바심과 압박감을 잊기 위해서 다른 곳에 정신을 쏟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타를 하면서도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자신이 정말 싫어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자괴감과 압박감, 조바심이 사람에게 닥치면 그냥 모든 것을 잊기위해

서 노력한다는데 나는 그 상황에서 잊기 위해서 스타크래프트의 ‘전략, 타이밍, 전술’을 계속 숙지하고 플레이에 옮기면서 계속 되뇌었다.

‘최선을 다하면 승리 할 수 있어. 최선을 다하면 되는거야.‘

수험생활에서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패닉을 극복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상한 집착은 스타로 계속 몰려들어만 갔다.

그리고...

스타크를 하다가 어느새 3일 내내 공부는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내 자신을 저주하면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외지에서 혼자 사니 무시무시하게 외로웠는데,

학원 마저 끊고 나니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기 시작했다.

왜 독방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보내고 난 뒤,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기서 30분 거리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도서관 직원이 이 도서관은 이 지역 주민만 사용이 가능 하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 부터는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난 이 지역 주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면서 공부를 하려는데...

깨달았다.

다시 재수하는 처음의 기분이었다.

책상이 싫고 2시간도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랬다. 공부하는 습관과 익숙함이 요 1달 정도 간에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다시 ‘리셋’되어 버리고 초조함과 욕심 속에서 공부가 짜증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분노가 터져 나왔다. 분노를 식힐 수가 없었다.

분노를 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는데 언제나 스타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며

다시 스타를 하는 바보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 당시.. 방 문...)

새벽 3시. 서울의 밤거리로 정처 없이 나섰다.

아무도 없이 고요함 속에 높은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정말로... 사람들이 없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슬프게 걸어 다녔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고요함 속의 싸늘한 새벽...



50일하고도 조금이 남았다. 이 남았다. 모든 것을 50일에 걸기로 했다.

이순신 장군님의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

라는 말을 벽에 붙였다.

이순신 장군님 보다는... 내가 훨씬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도 안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지난 번 보다는 잘 해 나갔지만 하루하루가 정말 버거웠다.

정말 공부가 힘들고 버거웠지만... 버티고 버티기로 했다.



나는 습관 하나가 있는데... 매주 쉬는 날이거나, 몸과 마음을 정리 해야 한다고 느끼면 ‘목욕탕’에 간다.

몸을 씻고 온탕에 들어가 반신, 또는 족욕을 하면서 앉아서 생각을 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씻고 몸을 회복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물에 떠있는 것도 좋아해서 (수영도 좋아 한다.)

그냥 탕에 천정을 본채로 둥둥 떠서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다.

삼수하면서... 나는 상당히 많이 갔다. 타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크게 망가져서 계속 다듬으려고, 회복하려고 그랬다고 생각한다.



(3수 때 갔던... 사우나 중 하나.)


수험 준비를 하면서. 매번 가만히 앉아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해야겠다...’

는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내 거처는 공부를 하려고 하면 모기가 마구 날아 다녔다.

얼마나 많았냐 하면...

하루에 2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얼마나 세상이 저주스러워 보였는지...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나는 모기나 잡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을 만큼 초조해져 버린 나를 발견했을 때 더욱 괴로웠다.

하루는 돈이 거의 떨어졌었다. 어머니께 내일 돈을

받기로 했었다. 남은 돈은 3000원. 삼각 김밥 3개를 사니 900원이 남았다.

물을 샀다.

1개당 아침. 점심. 저녁 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이젠 돈 계산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혼자 모기장 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먹은 이불속의 삼각 김밥은

너무나도 씁쓸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김밥 1개를 먹고 공부를 했다.

공부가 싫었다.

왜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있을까. 욕심이 많구나. 욕심이 많아...

그렇게 하루하루는 흘러갔다.

끝내 몸과 마음이 망가진 나는 아파서 방에만 누워 있었다.

모기장 속에서 잠을 자는데 한 번은 가위가 눌렸었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나의 귀에 속삭였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일어나지마... ’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공포스러웠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공간의 입구.)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로 매일 악몽 아닌 악몽의 하루하루였다.

컴퓨터와 게임, 나약한 정신, 아픈 몸. 형편없는 공부 효율, 극한의 외로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나는 서울에서의 수험생활을 마감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오셨다.

아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이게 뭐냐고 하셨다.

나는 하염없이 슬펐지만... 어머니를 실망 시켜드리기 싫어서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패배를 예감했다.

남은 기간은 10몇 일 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해서 집으로 내려와서 남

은 EBS만 다 풀어 보기로 하고 공부를 했다.

어머니에게 너무나 미안 했고 내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두려웠다.

공부가 너무나 부족함을 느꼈다.

왜 조바심을 냈을까. 차라리 천천히 공부하더라도 차근차근히 공부를 했다면...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욕심만 내고 조바심만 들어서 책만 펼쳐 놓고 집중 안 되면

서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었다.

그리고 수능을 치게 되었다.

결과는 언어영역 빼고는 참패였다.

특히 외국어에서 완벽하게 무너져 버렸다.

외국어영역 3등급. 80점대의 성적이었다.

1년 내내 외국어 걱정만 했던 것 치고는 정말 저조한 성적이었다.

점수, 점수..점수만을 외치면서 조바심과 욕심만 앞서서 공부를 차근차근 하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마구 한 게 후회되었다...







====================================================================
[Diary]

2005. 2. 5.

어느새 2005년이다. 나는 서울행 새마을 기차를 타고 있다.

얼굴에서 무거움과 탁함이 느껴진다.

일기를 보고 있으니... 정말로...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3년. 정말 나는 초지일관의 생각을 가지고 싸워 왔었구나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2년하고 남짓이다. 이 앞쪽의 일기는 5월에서 끊겨 있다.

6~9월. 나에겐 그토록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

지금도 서울의 그 힘든 골방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서러움과 가슴, 아니 나의 어딘가 한 부분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항상 생각나는 이미지, 아니 기억은 아무도 없고 곰팡이 슨 누런 방에

모기장 안 이불 속에서 고독과 수험생활에 미쳐가며 머리를 잡고 우는 것인가.

괴로워하는 것인가.

그러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잠들지 못한 잠을 자는..

아니 눈이 감겼던 나.

역시 말은 한계가 있다.

나는 분명 그때 몸과 마음이 부서져 깨어져 있었을 것이다.

다른이, 아니 내 자신도 어느 정도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학원은 도무지 나에게 맞는 학원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학원을 나왔지만 이미 늦은 9월. 아니..

왜 늦었다 생각 했을까.

고독과 오랫동안의 수험생활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지친데다가 나에게 적합한 공부할 공간을 결국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 나는 10월 정도에 이미 패배를 예상 하고 있었다.

그럴때 마다 나는 고3 시절의 교실 책상과 재수시절의 교실 책상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돈이 서울까지 와서 공부하기에 훨씬 많이 들건만 학습 효율은 지옥과 같이 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학생에 대한 애정은 없이 오로지 자신의 학벌 ‘●대’만 강하게 믿고 성의 없이 가르치는 강의와 말도 안되게 학생을 생각 해주지 않는 인간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은 학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듯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학원에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던 몇몇 선생님들도.. 나중에는 실체가 보였다.

좋은 분이 계셨지만, 극소수라서,

짜증만 가중될 뿐이었다.

나의 교실이었던 그곳은, ‘임시’ 건물 이어서 우리가 쓰고 건물을 옮겨야 되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였을까. 부산이나 대구의 학원비를 2배나 쳐 받으면

서, 시설은 더욱 좋지 않았다.

화장실위생, 교실크기, 사물함, 칠판, 조명.... 모든 것이 다 기대 이하였다.

그러나 나는 ‘공부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 는 생각으로 싸워나갔다.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나를 힘들 게 했던 요소는 1. 선생님 2. ‘에어컨’ 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학원에서 에어컨 따위 켜주지 않는 게 좋았다.

학교나, 타 학원 에어컨은 조절이 가능 했는데... 이쪽은 불가능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8시간 이상 그 앞에서 ‘계속’ 앉아 있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또한 에어컨을 틀어 놓은 방에서 TV를 본다던가, 그냥 앉아 있는 건 할수 있겠지만,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 들과 싸워야 하는 게 같은가?!

○●●! 괴로워하는 학생들 입장 따위 배려하지 않더라. ●할 ●들...

배운 점은... 물론 환경이 좋지 않았던 우리반은 1~3명의 ‘특정과목 괴수’ 밖에 없었지만.

아. 아. 역시 실력이 출중하게 이미 있는 아이들은 수업내용과 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 ? 이미 뛰어난 선생님이나 독학, 여러 가지 등으로 이미 알고 있기에 ‘복습’

만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딸리는 강의만 듣고 공부 하려는 나와 기타 학생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소위 메이져 학원이라면서 이런 식의 날림 강의가 많다니...

결국 많이 학원을 나갔지만...

끝까지 버티면서 재수 때처럼 할 수 있다고 해봤지만...

여러 가지의 악조건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 어느새 기차는 서울에 도착 했구나.

그리고 다시 봄이 되어 버렸구나.

나중에 적도록 할게. 내자신아...

아 아직 도착은 아니구나.

교육과정이 바뀐 것도... 나에겐 호재이자 악재이구나.

후... 아 도착했네. 그럼 진짜 나중에 보자.

2005. 2. 5. 서울역 오후 1:24. 새마을 기차 안에서.

====================================================================

그리고... 나는 원서를 포기 했다. 아무렇게나 넣고 3패.

바보 같은 내 자신의 실수를 다시 바로 잡고 싶었다.

군대를 연기 할 수 없어서, 대학을 1년 걸어 놓고,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5년 동안의 저녁 밤하늘 (3수) -악몽-

=====================================================================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